[최정아의 연예It수다] 잔나비, 웃고 울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밤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적당한 말로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음악으로 풀어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청춘의 얼굴이라 부른다. 그리고 시대마다 그 시절의 청춘을 닮은 얼굴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산울림이, 1980년대에는 들국화가 그랬다. 사랑과 이별, 불안과 낭만을 노래하며 한 시대의 감정을 대변해온 밴드들이다.

 

2010년대 이후에는 그 자리를 잔나비가 이어받았다. 누군가에게 잔나비의 음악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서툴렀던 사랑과 뜨거웠던 여름의 기록이다. 잔나비의 노래의 전주를 듣는 순간 그 시절의 풍경과 그때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까지 함께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다.

 

◆쉽게 가지 않는다…잔나비의 매력

 

그런 잔나비가 이번에도 일을 크게 벌였다.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 KSPO DOME(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다. 23일에는 데뷔 이후 처음 시도하는 발라드 컬렉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24~25일에는 첫 아시아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웨트 앤 스타더스트'를 선보였다. 사흘간의 공연은 예매 시작 5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뭐 하나 쉽게 가지 않는다. 한 공연장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콘서트를 연다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셋리스트가 바뀌면 편곡과 연습량도 달라진다. 영상과 조명, 무대 동선까지 다시 맞춰야 한다. 준비 기간은 물론 제작비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실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고된 선택이지만 관객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밴드가 잔나비다. 관객에게 새로운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관객 속에 들어간 잔나비 최정훈, 사진=본사 취재
관객 속에 들어간 잔나비 최정훈, 사진=본사 취재

◆체조경기장을 홍대 공연장처럼 만든 밤

 

지난 23일 열린 발라드 컬렉션은 그동안의 잔나비 공연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오늘 잔나비 공연이 없었다면 내 모습…'이라는 설정 이후 각각의 챕터로 나뉘어 노래가 펼쳐졌다. 김도형, 최정훈에게도 낯선 도전이었다. 최정훈은 공연 초반 “태어나 처음으로 얌전하게 공연을 꾸며볼 거다. 근데 어떻게 될지 모른다. 중간에 이게 아닌데 싶으면 다른 걸 보여드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잔나비가 얌전하게 공연을 한다니. 역시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애틋한 노래로 객석을 적시다가도 어느 순간 장난기가 튀어나왔다. 차분하게 노래를 듣던 관객들도 금세 웃고 환호했다. 발라드 컬렉션이라고 해서 잔나비 특유의 흥까지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피부과 선생님이 ‘잔나비 공연에서 땀이 나느냐’고 했다”면서 현장의 웃음을 자아낸 김도형이다. 이후 “발라드 공연이 잔잔할 것 같지만 뜨거운 무언가는 더 있는 거 같다”는 말로 객석의 공감을 자아낸다.

 

잔나비 공연은 듣는 맛만큼 보는 맛도 좋다. 이번에는 무대 연출에 더욱 공을 들였다. 360도 돌출 무대, 천장에서는 조명이 움직이고, 객석 위로 꽃가루가 흩날렸다. 대형 모니터에는 오래된 필름을 연상시키는 색감의 영상과 손글씨, 애니메이션이 등장했다. 실시간 카메라로 잡아낸 두 사람의 모습도 노래의 분위기에 맞춰 화면에 담겼다. 체조경기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무대 효과를 아낌없이 활용했다.

 

화려한 연출만큼 음향에도 신경 쓴 흔적이 느껴졌다. 김도형의 기타 소리와 최정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어우러졌다. 익숙한 곡도 새롭게 들렸다. 특히 발라드 중심으로 구성한 공연인 만큼 섬세한 소리의 차이가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무대가 커졌다고 음악의 세밀함까지 놓치지 않은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지독하다(positive)’는 말이 나온다.

 

잔나비와 구닥다리 영웅들, 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와 구닥다리 영웅들, 사진=페포니뮤직

공연 후반부에는 분위기가 또 한 번 달라졌다. 잔나비는 구닥다리 영웅들과 관객에게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홍대의 작은 공연장이나 연습실에 놀러 온 듯한 편안한 공기다.

 

반가운 노래 ‘봉춤’도 흘러나왔다. 최근 공연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옛 노래들이 이어지자 오래된 팬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수록곡까지 빠짐없이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뜻밖의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서른 명 남짓한 관객 앞에서 노래하던 시절부터 잔나비를 지켜본 팬들에게는 더욱 각별했을 것이다. 버스킹에서 시작한 밴드가 아시아 투어를 마치고 신청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그 시간과 성장을 함께 지나온 이들에게 눈물이 왈칵 날 만큼 벅찬 장면이었다.

 

최정훈이 무대를 벗어나 객석 사이에서 노래하는 모습도 볼거리다. 멤버 김도형의 할머니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잘 짜인 공연 사이사이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끼어든다. 잔나비 공연이 매번 재미있는 이유다. 대형 공연장의 화려함을 갖췄으면서도 작은 공연장에서 관객과 주고받던 친밀함을 잃지 않았다.

 

지난 6월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홍콩, 도쿄, 싱가포르, 방콕,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까지 7개 도시를 돌고 돌아온 잔나비다. 이번 서울 공연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체조경기장을 사흘이나 채울 만큼 성장했지만 무대 위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해맑았다. 땀에 젖은 얼굴로 웃고, 관객의 환호에 행복해하고, 몇 번이고 고마움을 전했다.

 

최정훈은 "한국에서 꼬꼬마 시절부터 응원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호강스러운 여름을 보냈다"며 "지금부터는 여러분께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아시아 투어를 다니며 앞으로 더 멋진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지나간 ‘나’를 불러내고, 다시 살아갈 힘까지

 

공연 내내 두 사람의 표정을 보게 됐다. 무대 위에서 저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저렇게까지 열심히 뛸 수 있을까. 보는 사람마저 기운이 난다. 공연을 잘하는 밴드는 많다. 하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지 객석 끝까지 전하는 밴드는 흔치 않다.

 

잔나비의 노래에는 유독 청춘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스무 살 무렵에만 듣는 음악은 아니다. 나이가 들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사는 일이 조금씩 버거워져도 그 노래를 들으면 잊고 지냈던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오래된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문득 울컥하는 이유다.

 

산울림과 들국화의 노래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랑받듯, 언젠가 잔나비의 음악도 누군가에게 한 시대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는 그렇다.

 

기자는 얼마 전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다.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까지 제자리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채 조금씩 지쳐 있었다. 그러다 잔나비 공연을 만났다. 익숙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웃다가 울컥하기도 했다. 누군가 대단한 위로의 말을 건넨 것도 아닌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음악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잔나비, 사진=페포니뮤직

무대 위 두 사람을 보면서는 또 다른 힘을 얻었다. 땀에 흠뻑 젖어 뛰어다니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에 온몸을 던지고, 관객의 환호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했다. 저렇게 열심히,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자극받지 않을 수 있을까. 덕분에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일상을 힘껏 살아보고 싶어졌다.

 

좋은 공연은 끝난 뒤에도 사람을 움직인다. 잔나비는 이번에도 그랬다. 지나간 청춘을 추억하게 하더니, 이젠 내일을 살아갈 힘까지 챙겨줬다.

 

장하다, 고맙다, 잔나비.



최정아 기자 cccjjjaaa@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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