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친일파 글씨’ 논란에 고개 숙여…“중대한 불찰, 전공자라 확신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 및 유관기관 국정감사에서 ‘친일파 글씨 추천 논란’과 관련해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 및 유관기관 국정감사에서 ‘친일파 글씨 추천 논란’과 관련해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글씨를 애국지사의 유묵으로 잘못 전시하고, 해당 작품이 자신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데 대해 공식 사과했다. 유 관장은 별도의 감정 없이 서예사 전공자로서 작품을 확신했다고 인정하며 “부끄럽고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밝혔다.

 

유 관장은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업무보고에 앞서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내주신 깊은 신뢰와 박물관 직원들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가치가 저의 중대한 불찰로 한순간에 무너졌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어떤 학술적 취지나 설명도 국민들이 느끼실 실망감 앞에서는 핑계가 될 수 없다”며 “철저하지 못한 고증으로 친일파의 글씨가 애국지사의 유묵으로 잘못 전시돼 국민 여러분과 역사 앞에 큰 심려를 끼쳐드렸다”고 말했다.

 

이어 “고증 오류로 독립운동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족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며 애국지사 박원근 지사와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박물관 직원들에게도 미안함을 전했다. 유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랜 세월 지켜온 학술적 전문성과 유물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박물관 직원들의 소명의식과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라며 “관장 개인 소장품을 비롯한 논란으로 국민적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 직원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특히 논란이 된 작품이 자신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공개한 데 대해서도 잘못을 인정했다.

 

유 관장은 “전시품 철수와 검증 결과 발표 당시 대국민 사과를 올렸으나 관장 개인 소장품임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다”며 “미술사학자로 살아온 제 실수를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한 것은 중대한 착오이자 불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상처받았을 박원근 지사 유족과 박물관, 저에게 실망한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죄드린다”며 단상 앞에서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이날 국정감사에서는 작품의 진위 검증 과정과 개인 소장품 전시 경위를 둘러싼 질의도 이어졌다.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논란이 된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 유묵에 대해 별도의 감정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묻자 유 관장은 “나 자신이 서예사 전공자라서 확신했다”고 답했다.

 

유 관장은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한국 문화유산과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유 관장은 “처음에 ‘일반시국은’ 유묵을 내놓으면서 내 소장품이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내 개인 자랑이 될까 봐 안 했다”며 “이후 박중양의 작품으로 밝혀진 뒤에는 미술사가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사랑과 자랑은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되지만, 실수와 죄책감은 현재형으로 남는다고 했다”며 “이를 교훈으로 삼아 박물관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논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7월 개막한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서 ‘일반시국은’이라는 글씨를 애국지사 박원근(1912∼1950)의 유묵으로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일반시국은’은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라는 뜻이다.

 

박물관은 당시 작품에 적힌 ‘한인(韓人) 박원근’이라는 서명을 근거로 애국지사의 글씨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외부 제보를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1874∼1959)의 글씨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진위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박물관은 작품을 철거하고 서예·근현대사·고문헌·보존과학 분야 전문가 7명과 함께 재검증에 나섰다. 그 결과 해당 글씨가 박원근 지사가 아닌 박중양의 작품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박중양은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와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로도 알려져 있다.

 

논란은 해당 작품이 유 관장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더욱 커졌다. 국회 문체위 소속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확보한 박물관 답변서에 따르면 박물관은 “‘일반시국은’이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 관장의 소장품임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유 관장은 2019년 온라인 경매를 통해 해당 유물을 구입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경매에서는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참여한 ‘박덕원’의 작품으로 소개됐으며, 시작가 1만원에 출품돼 5만원에 최종 낙찰됐다.

 

유 관장은 전시품 출품 동의서에 기재한 해당 작품의 보험 평가액이 30만원이라고도 밝혔다. 보험 평가액은 전시 도중 작품이 파손되거나 도난당하는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한도 금액이다.

 

박물관 측은 나라가 어려울 때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해당 작품을 전시에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영규대사의 문구를 전시에 소개하기로 결정한 뒤 유 관장의 추천을 받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작품을 빌렸다는 입장이다.

 

유 관장은 해당 글씨를 부여문화원에 기증하기 위해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부여군립미술관 건립을 위해 여초 김응현의 작품 등과 함께 기증할 예정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박물관과 유 관장이 여러 차례 검증 부실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작품의 소유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특히 전시에는 유 관장이 소장한 자수 상보자기도 출품됐으며, 유 관장의 부인이 기증한 ‘돌 호랑이’ 상도 박물관 열린마당 계단에 전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자신의 소장품을 직접 추천해 국가기관의 전시에 출품한 것이 적절했는지를 놓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를 통해 개인 소장품의 가치를 높이려 한 것 아니냐는 이른바 ‘유물 세탁’ 의혹까지 거론되고 있다.

 

20여년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박물관인들은 역사와 문화를 지킨다는 자존심 하나로 일하는데 참담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유 관장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람객 증가세도 언급했다. 그는 “오늘 기준으로 박물관 관람객이 600만명을 넘어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며 “올해는 연간 관람객이 7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 흥행으로 인한 반짝 상승이 아니라 전 국민이 일상에서 즐기고 사랑하는 문화 공간이 됐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변화”라고 강조했다.

 

지동현 기자 ehdgus121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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