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스크린 밖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정치권이 가세해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법적 다툼까지 이어지고, 급기야 주연 배우 자택 앞에서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까지 열렸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암살자(들)’은 1974년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정부의 공식 발표와 달리 극 중 일부 인물이 당시 일본과의 외교 관계 등을 근거로 중앙정보부 윗선이 배후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내놓는 장면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정치권 번진 역사 왜곡 공방…배우 집 앞 시위까지
개봉 직후 논란은 정치권으로 빠르게 옮겨붙었다. 국민의힘에서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정치적 의도가 담긴 내용을 전달한다는 취지의 비판이 잇따랐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영화의 내용을 두고 “육영수 여사 피격 배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는 참으로 황당한 스토리”라고 비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인 유영하 의원 역시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은 패륜 행위”라며 날을 세웠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도 영화 속 묘사가 사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5일 충북 옥천군의 육 여사 생가에 집결해 ‘암살자(들)’을 규탄했다. 장 대표는 “불순한 의도로 역사를 왜곡했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은 소속 의원 전원 명의로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 ‘‘암살자(들)’’의 개막작 선정을 철회해 달라는 서한도 보낼 예정이다. 6일에는 대구·경북(TK)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 대한 제작사의 사과와 상영 중단을 거듭 촉구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은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같은 공세가 작품에 대한 정당한 비판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맞섰다. 최민희 민주당 최고위원은 “왜 지금 이 시점 유독 ‘암살자(들)’에 대해서만 이런 무지막지하고 치졸한 정치 공세를 하느냐”고 비판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둘러싼 의혹이 과거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에서도 다뤄졌다는 점을 거론했다.
최 최고위원은 미국에서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JFK 등 공식 발표와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들며 정치권이 문화예술 영역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K-문화 예술로 국익이 뻗어 나가려는 이때 찬물을 끼얹지 마시라”고 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이재정 민주당 의원은 “이 영화는 명백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여 가능성을 영화적 상상력의 범주에도 넣지 않았다”며 “영화가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이 영화를 왜곡한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국민의힘이 이번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암살자(들)’ 논란과 관련한 증인·참고인 채택 등을 요구하는 데 대해 “이 영화를 국감장에 끌고 오는 일도 창작에 대한 재갈”이라며 “문체위원장으로서 단호히 원칙을 지키겠다”고 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주 의원은 유해진의 출연작 등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글에 그의 외모를 두고 ‘북한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란을 낳았다. 지난 4일에는 일부 보수 성향 단체 회원들은 배우 유해진의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영화 상영 중단과 제작진·배우의 사과 등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해진 측은 “불법 행위로부터 소속 배우의 권익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제작진 고발까지…실제 처벌 가능성은
논쟁은 법정으로도 향하고 있다.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김원국 대표와 허진호 감독, 권기준·이지민 작가 등 4명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됐다.
법조계에서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더라도 상상력이 더해진 창작물인 만큼 형사처벌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영화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려면 단순한 의견이나 영화적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허위 사실을 적시했고, 제작진이 이를 허위라고 인식하면서도 표현했다는 점 등이 입증돼야 한다. 이를 통해 박 전 대통령 혹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점까지 입증돼야 처벌받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닌 창작물 내용이 허위사실 적시로 분류될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더군다나 ‘암살자(들)’은 영화 시작 전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일부 내용은 각색됐다고 밝히고 있어, 극중 설정을 구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렵다는 판단이다.
사자명예훼손죄는 친고죄로, 유족 등 고소권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유족이 직접 고소하지 않는다면 제3자의 고발만으로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창작물을 둘러싸고 명예훼손 고소·고발이 제기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제작진이 실제 형사처벌까지 받은 경우는 찾기 어렵다.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 제작진이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2010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영화 명량도 배설 장군 후손들이 허구적 묘사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제작진을 고소했지만 불기소 처분됐다.
지동현 기자 ehdgus121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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