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오늘 제일 중요한 순간에…(웃음)”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만루에서 대타로 출전해 한 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투수와 마주했다. 중압감에 짓눌릴 법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단순했다. ‘어떻게든 외야로만 보내자’며 마음을 다잡은 것. 그렇게 외야수 김민혁(KT)은 호쾌한 스윙 한 번으로 주자 셋을 모두 불러들이며 역전승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프로야구 KT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서 열린 LG와의 2026 신한 SOL KBO리그 원정경기에서 16-4로 크게 이겼다. 승부를 바꾼 건 김민혁의 적시타였다. 2-3으로 뒤진 7회초 1사 만루에서 대타로 나서 좌중간 3타점 2루타를 터뜨리며 단숨에 경기를 뒤집었다.
이때 역전 결승타로 물꼬를 튼 마법사들은 7회 6점, 8회 7점을 몰아쳤다. 2연패서 벗어난 선두 KT는 63승째(2무41패)를 기록, 같은 날 패한 2위 삼성(63승2무43패)과의 격차를 한 경기로 벌려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선발로 나서지 않은 건 오른손 중지를 삐끗한 뒤 붓기와 불편감이 살짝 있었기 때문이다. 김민혁은 “수비도 가능하고 타격에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팀에서 관리를 해주시고 있다”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운명의 7회’였다. 더그아웃의 짧은 주문도 있었다. 7회 공격을 앞두고 유한준 타격코치가 야수들을 한데 모았다. 평소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이날만큼은 침체된 분위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KT는 이번 잠실 원정 앞선 두 경기에서 합계 3득점에 그쳤고, 이날도 6회까지 1점에 묶여 있었다. 김민혁은 “방망이를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내자고 하셨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라도 일어난다는 얘기였다”면서 “선수들이 부담을 내려놓고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만루 상황이 찾아왔지만, 김민혁은 자신에게 그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KT 벤치엔 올 시즌 대타로만 타율 0.341(41타수 14안타)을 기록 중인 이정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운드에 오른 우강훈(LG)은 김민혁이 한 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낯선’ 투수였다.
김민혁은 “대타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안 나가겠지, (이)정훈이 형이 나가겠지’라고 생각했다. 정훈이 형이 대타로 워낙 잘 치고 있지 않나”라며 “그런데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서 긴장을 정말 많이 했다”고 미소 지었다.
뜨거웠던 머리는 잠시였다. 그는 “나가서 ‘못 치면 독박이다’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치면 영웅’이지 않나.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했다”며 “어떻게든 외야로 보내서 동점부터 만들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타구가 좌중간으로 뻗어나가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잡히고 안 잡히고를 떠나 일단 외야로 보냈다는 데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다.
살얼음판 승부가 이어지는 시즌 후반, 어느덧 베테랑이 된 김민혁의 어깨도 가볍지만은 않다. 동시에 긍정적인 긴장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팀의 첫 가을야구는 물론 우승, 숱한 순위 싸움들을 모두 겪었다. 5번의 포스트시즌 역시 모두 개근했을 정도다.
현역으로 뛰는 KT 창단 멤버는 이제 김민혁과 고영표, 문상철 셋뿐이다. 어느덧 후배들을 이끌어야 할 위치가 된 김민혁은 “어릴 때는 형들의 등만 보면서 야구했다면 이제는 형들도 받쳐주고 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제도 삼성 경기를 보면서 들어갔다. 몇 년 동안 마지막까지 순위가 결정되지 않는 상황을 계속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1년처럼 정규리그 1위를 가리기 위한 타이브레이커까지 치르는 접전을 바라는 팬들도 있다는 말에는 “(우리 팀) 팬분들이 그럴 리가 있나요”라며 웃었다.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가다듬은 김민혁은 “그래도 이런 경쟁을 즐겨야 한다. 우리는 결국 결과를 내야 하는 직업이고 선수들 모두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있다”며 “해야 한다. 결국 해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동시에 5년 전 통합우승 당시 1, 2군을 오갔던 만큼 당시 치열했던 우승 경쟁을 온전히 기억하거나, 체감하진 못했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함께 정상에 섰던 동료들로부터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배웠다고도 덧붙였다. 김민혁은 “그때를 기억하는 선수들 말로는 ‘기회가 왔을 때 해야 한다’고 하더라. 이런 기회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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