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준비한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다. 음문석이 걸어온 길이 그렇다. 가수로 데뷔한 뒤 배우로 방향을 넓혔고, 주목받지 못한 시간에도 꾸준히 연습실을 찾았다. 걸음을 멈춘 적은 없었다. 음문석의 성공을 모두가 축하하는 이유다.
◆얼굴부터 말투까지 지웠다
배우 음문석이 영화 ‘호프’에서 낯선 얼굴을 꺼냈다. 헝클어진 머리와 거친 피부, 툭 튀어나온 입, 쩝쩝거리는 소리,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은 기존의 음문석을 완전히 지웠다. 일부 관객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양배를 연기한 배우가 음문석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음문석이 맡은 양배는 비무장지대 인근 호포항에 사는 목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발견해 집으로 가져오면서 마을에 벌어지는 거대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악의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등장할 때마다 극의 공기를 바꿨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호프’는 호포항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SF 액션 스릴러다. 출장소장 범석을 비롯한 주민들은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렸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번졌다.
◆“나홍진 감독 작품에 내가 나온다고?”…충청도 사투리로 얻은 양배
음문석과 양배의 만남은 오디션에서 시작됐다. 나홍진 감독은 음문석이 충청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사를 충청도 사투리로 연기해보라고 제안했다. 음문석은 오디션을 마치고 귀가한 뒤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나홍진 감독의 작품에 음문석이 출연한다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다”며 “심지어 대사까지 있다는 사실이 기뻐 점프하고 난리가 났다”고 밝혔다.
개봉 이후에는 봉준호 감독이 자신을 언급한 영상도 반복해서 봤다. 기쁨은 컸지만 들뜨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잡았다.
음문석은 “그 영상을 백 번도 넘게 돌려보며 행복해했다”며 “그러다 ‘나태해지지 마라. 지금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밝혔다.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절대악”…모순에서 시작된 캐릭터
양배는 선하거나 악하다는 기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나홍진 감독이 음문석에게 건넨 첫 설명부터 모순에 가까웠다.
음문석은 “감독이 처음 양배를 설명하면서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절대악’이라고 했다”며 “세상의 나쁜 사람들은 경찰에게 잡히기 때문에 양배보다 하수라고 했다”고 밝혔다.
나홍진 감독은 “나쁜 사람들은 경찰에게 잡히지만 양배는 잡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잘못을 저지른다는 인식조차 없는 양배에게는 일반적인 선악의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음문석은 이 말을 양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악의를 강조하면 전형적인 악인이 됐다. 반대로 천진난만함만 드러내면 인물의 잔혹성이 사라졌다. 특정한 감정이나 의도를 연기에 담는 순간 양배라는 인물이 단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양배에게는 특정한 색깔이 없다”며 “주도적인 색은 없지만 여러 성질이 복합적으로 섞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방향을 잡고 연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양배에게 접근했다”고 밝혔다.
◆위험한 가위를 들고 웃은 조카…“이게 양배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양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어린 조카에게서 찾았다. 어느 날 음문석은 조카가 위험하게 쪽가위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봤다. 아이의 어머니가 가위를 빼앗았지만 조카는 웃으며 다른 물건을 가지고 놀았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보였던 모습이 음문석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아무런 악의 없이 위험한 행동을 반복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양배의 본질을 발견했다.
그는 “조카가 웃는 모습이 어느 순간 무섭게 느껴졌다”며 “그때 ‘이거다. 이게 양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음문석은 양배가 사회적·도덕적 관념에서 벗어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어른의 기준으로 행동을 해석하면 양배는 결국 선이나 악 가운데 한쪽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양배를 어른의 선으로 바라보면 그 기준에 걸릴 수밖에 없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시선으로 접근하자 조금씩 답이 보였다”고 밝혔다.
다만 양배를 단순히 천진난만한 아이로만 연기하지는 않았다. 양배는 냉동고에서 녹기 시작한 외계 생명체를 보며 신선도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서울에 가져가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진함과 잔혹함이 한 인물 안에 공존했다.
음문석은 “양배는 무섭고 잔인하게 보이지만 연기할 때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며 “외계인을 잡은 날도 양배에게는 평범하고 편안한 하루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동물 사체도 양배에게는 장난감이었다
저수지 아래 자리한 양배의 집은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집 안에는 동물 사체와 마네킹 등이 가득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음산하고 기괴한 장소지만 양배에게는 자신이 정성스럽게 꾸민 집이었다.
음문석은 “양배에게 집 안의 물건은 모두 장난감이었다”며 “성인의 시선과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장난감이 많은 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양배는 경찰들에게 ‘내가 꾸민 집이다. 귀엽고 예쁘지 않느냐’는 마음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집에서 발견된 아기 외계 생명체에게는 음문석만의 이름도 붙였다. 그는 아기 외계인 칼리를 ‘쪼꼬미’라고 불렀다. 극에는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양배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설정이었다.
그는 “혼자 칼리의 이름을 ‘쪼꼬미’라고 붙였다”며 “경찰들을 집에 데려간 것은 쪼꼬미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들은 칼리를 가져가고 양배의 집까지 망가뜨렸다. 양배는 울면서 집을 떠났다. 음문석은 이 장면을 분노보다 서운함에 가깝게 해석했다.
그는 “자랑하고 싶었는데 경찰들이 쪼꼬미를 가져가고 집까지 아작 냈다”며 “양배는 서운해서 울면서 나갔고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