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속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 울면 어미닭은 밖에서 껍데기를 쪼아준다. 안팎의 힘이 맞아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자성어 ‘줄탁동시’, 한국 여자야구에게도 필요한 대목이다.
오랜 담금질 끝에 조금씩 빛이 드리운다. 선수들의 분투에 한국여자야구연맹을 비롯한 조력자들의 노력이 맞물리면서 단단했던 껍데기에 비로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값진 결실 가운데 하나는 단연 김현아(보스턴 헌터스)와 김라경(뉴욕 하이츠), 박주아(샌프란시스코 파이어벨스)의 미국 여자프로야구(WPBL) 진출이다. 그동안 바탕을 다져온 연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2007년 발족해 선수 육성과 국내·외 대회 개최 및 파견, 국가대표 운영을 통해 여자야구의 기반을 넓혀왔다.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 마련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5월 충남 천안야구장서 열린 ‘여자야구 페스티벌 2026’에는 전국 30개 팀, 약 500명이 참가했다. 2019년 5∼10명 수준이던 주니어 올스타전 참가 규모도 올해 30명 안팎으로 커졌다. 연맹은 국내 유일의 주니어 여자야구단 천안주니어를 지원하는 한편, 수도권과 영남에도 육성 거점을 마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수미 연맹 사무국장은 “학교 (소속) 팀을 만들려 하면 선수가 없다고 하고, 선수를 키우면 졸업 뒤 갈 곳이 없다고 한다”며 “아래부터 하나씩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성장 속도가 더디게 느껴질 때는 야마다 히로코 일본여자야구연맹 회장의 말을 떠올린다. 조바심보다 꾸준함이 먼저라는 메시지다. 이 사무국장은 “일본 여자야구 역사는 100년이 넘지 않나. 20년도 안 된 한국이 이만큼 왔으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 전했다.
여자야구가 품은 가능성을 대중의 관심으로 확장하는 움직임도 이어진다. 미술사와 건축사를 전공한 정수경 대표는 ‘턱 괴는 여자들’을 꾸려 여자야구 연구서 『외인구단 리부팅』을 출간한 뒤, 수년의 고민을 거쳐 콘텐츠 스튜디오 뉴스트럭처를 설립했다.
오랫동안 여자야구를 가까이서 지켜본 ‘인사이더이자 아웃사이더’로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선수들을 조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정 대표는 “언젠가 딸이 ‘저 마운드에 서보고 싶다’고 말할 때 망설이지 않고 응원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연맹과 손잡고 선수들의 WPBL 도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다. 그는 “운동하는 여성에게서 특유의 멋을 봤다. 이들의 이야기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모습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선수의 경기력과 개성, 성장 과정을 콘텐츠로 쌓아 팬덤과 브랜드로 확장하는 여성 스포츠 지식재산권(IP) 하우스를 지향한다. 정 대표가 그리는 청사진은 한국판 『H2』다. 야구를 매개로 청춘과 성장, 사랑을 그려 일본 현지뿐 아니라 한국서도 큰 인기를 얻은 해당 만화처럼, 여자야구 선수들의 삶과 매력을 대중이 공감할 이야기로 풀어내는 게 목표다.
첫 동행자는 포수 김현아다. 그의 리더십과 잠재력을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우리의 주인공이 돼 달라”고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쌓은 신뢰는 매니지먼트 계약으로도 이어졌다. 정 대표는 “선수가 다른 걱정을 덜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더 많은 여성 스포츠 콘텐츠를 만들고, 더 많은 선수와 함께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매니지먼트도 선수들의 도전을 뒷받침하는 한 축으로 자리 잡아간다. 국가대표 유격수 박주아는 지난해 WPBL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며 외부 연락과 일정 조율 등 크고 작은 실무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여러 회사와 만난 끝에 국내 대표 스포츠 에이전시 리코와 손잡았다.
당장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줄 상황은 아니라는 현실을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리코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지금 도울 수 있는 부분부터 최대한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박주아 역시 첫 만남부터 아낌없이 조언을 건넨 이예랑 대표에게 신뢰가 갔다는 설명이다.
같은 에이전시엔 구자욱(삼성)과 고영표(KT), 양의지(두산) 등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몸담고 있다. 스롱 피아비(당구·우리금융캐피탈), 박소희(농구·하나은행), 이소연(쇼트트랙·스포츠토토) 등 여성 스포츠 선수들과도 한솥밥을 먹는다. 박주아는 리코 소속 선수 가운데 유일한 여자야구 선수이기도 하다.
계약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홀로 짊어져야 했던 판단의 무게를 나눌 곳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혼자였다면 매번 어떤 상황에 앞서 이 일을 해도 될지 말아야 할지 끙끙 앓았을 것”이라며 “이젠 회사 내 미디어를 경험한 분들은 물론, 동료 선수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물어볼 곳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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