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소식을 접한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통해 접하는 세상의 이야기다. IT 기술의 발달로 공유 문화가 익숙해지면서 정보의 확산 속도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많은 정보가 스쳐 가고, 때로는 검증되지 않은 가십이 뇌리에 깊숙이 박히기도 한다.
문제는 진위는 확인하지 않은 채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옮겨가는 ‘카더라’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숏폼에 뜨는 ‘OO녀’, ‘OO남’ 자막을 여과 없이 수용하며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들을 향한 낙인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지 않다. 게시물 하나, 발언 한마디면 충분하다.
알고리즘은 진위를 따지기 전에 확산부터 시킨다. 자극적인 소재일수록 검증보다 조회 수가 앞서고, 낙인은 그사이 완성된다. 최근 벌어진 두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성격은 다르지만 결은 같다. 사실관계가 정리되기도 전에 낙인이 먼저 찍혔다.
◆사투리인가, 일베어인가…맥락 없는 낙인
음원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걸그룹 리센느가 최근 난데없는 '일베 프레임'에 갇히며 홍역을 앓았다. 리센느는 경남 거제 출신 원이의 개인 유튜브 채널로 주목받았다. 구수한 사투리를 앞세워 인기를 끌었지만, 사투리가 발목을 잡았다. 불 꺼진 방을 보고 “무섭노. 조명부터 무서운데”라고 한 말을 두고 일베식 표현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부터다.
이를 두고 MBC경남 김현지 PD가 자신의 SNS에 해당 어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할 때 쓰이는 ‘∼노’체와 닮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등 정치권 인사들까지 논쟁에 가세하며 사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논란이 커지자 경상도 출신 누리꾼들도 발 벗고 나서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증언했다. 앞서 안태형 동아대 교수는 동남방언의 ‘-노’가 의문형뿐 아니라 혼잣말, 한탄, 독백 같은 감탄형으로도 쓰인다고 설명한 바 있다. 누리꾼들은 ‘∼노’체를 사용한 방송 자료 화면들도 끝없이 소환했고, 이를 일베식 표현으로 단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언어학적·지역적 맥락은 사라진 채 정치적 셈법만 더해지며 본질과 무관한 논쟁으로 번진 셈이다. 정작 당사자인 원이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고 논란을 떠안아야 했다.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일베가 오염시킨 표현이지만, 맥락 없이 이를 모조리 일베식 표현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같은 표현이라도 맥락에 따라 의도에 맞춘 해석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몰랐다”는 아이들, 책임은 누구에게
비슷한 시기, 고교 스포츠 현장에서도 낙인이 찍혔다. 지난달 29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81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배재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에서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라는 외침이 나오면서 촉발됐다. 해당 이벤트는 5·18을 폄훼하는 의미로 해석돼 앞서 소비자 반발을 산 바 있다. 배재고 학생들의 구호가 이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며 '지역 비하' 논란으로 번졌다.
학생들은 상대팀을 조롱하려는 구호였을 뿐 정치적 함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단순히 “몰랐다”는 한마디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배재고 야구부에 6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내렸다. 재심을 거쳐 1개월로 감경되긴 했지만, 구호를 선창한 학생들에 대한 학교 자체 징계 절차도 별도로 진행 중이다. 과오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할 사안이다.
문제는 낙인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구호를 외친 건 야구부 학생 일부였지만, 비난은 배재고 전체로 번졌다. 학교 정문 앞에는 야구부를 성토하는 근조화환이 잇따라 놓였고, 사건과 무관한 재학생들까지 조롱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학교는 전교생 사복 등교를 공지했다. ‘배재고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잡아 비난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다. 일부의 잘못이 전교생의 낙인으로 돌아왔다. 정작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다수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운동장의 싸움이 사회적 이슈로 번지자 어김없이 정치권이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야구부 해체를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일부 보수 성향 시민단체는 미성년자에게 과도한 징계라고 주장했다. 고등학생들의 말 한마디가 정치적 프레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고등학생들이 어디서, 왜 이런 구호를 아무렇지 않게 외치게 됐는가다. 정치적 맥락도, 역사적 무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온라인 생태계에서 무분별하게 소비되던 혐오 밈을 그대로 흡수해 재생산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필터 없이 퍼지는 어른들의 언어가 학생들에게까지 스며든 결과라면, 우리 사회가 가지는 책임도 돌아봐야 한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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