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
예전에도 이 말이 꼭 지켜지는 약속은 아니었다. 헤어질 때 하기 좋은 인사말에 가까웠다. 그런데 요즘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밥값이 무서워 약속을 미루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친구를 한번 만나려면 생각보다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식당을 예약하고, 밥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분위기가 좋으면 술도 한잔한다. 멀리 사는 친구라면 교통비가 붙고, 늦게 끝나면 택시비도 따라온다. “얼굴이나 보자”며 시작한 약속이 집에 돌아와 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 소규모 경제 위기로 돌변한다.
최근에는 이런 현상을 ‘프렌드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친구를 뜻하는 ‘프렌드’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을 합친 말이다. 최근 Z세대 60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93%가 물가 상승 때문에 친구와의 만남 비용을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71.2%는 최근 1년간 관련 지출을 줄였고, 지출을 줄인 사람 가운데 83.9%는 아예 만나는 횟수까지 줄였다고 한다. 가장 부담스러운 비용은 역시 식사비였다.
숫자만 보면 청년 세대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프렌드플레이션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나이가 들수록 만남은 오히려 더 거창해진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아무 데나 갈 수 없고, 좋은 날인데 대충 먹을 수 없으며, 누군가의 생일이나 승진, 출판, 이직, 자녀 입학까지 축하할 일도 늘어난다. 우정을 지키려다 축의금과 선물비의 지배를 받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문제는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보다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이번 달은 사정이 좀 어려우니 저렴한 곳에서 보자”고 말하면 괜히 초라해 보일까 걱정한다. 비싼 여행이나 모임을 거절하면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비칠까 신경이 쓰인다. 결국 형편이 어려운 쪽이 조용히 약속을 피하고, 연락을 늦게 확인하고, 바쁜 척하게 된다. 돈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관계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SNS도 우정의 단가를 높이는 데 한몫한다. 생일은 케이크 하나로 끝나지 않고 호텔이나 근사한 식당에서 사진을 남겨야 할 것 같다. 친구들과의 여행도 가까운 곳에 다녀오는 것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가장 화려한 하루를 계속 보다 보면 우리의 평범한 만남은 지나치게 평범하게 느껴진다. 우정에도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장면이 필요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래 기억에 남는 친구와의 시간은 의외로 비싸지 않았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던 떡볶이, 편의점 앞에서 나눠 마신 캔맥주, 목적지도 없이 걸으며 했던 이야기들이 더 선명하다. 장소가 좋아서 즐거웠던 것이 아니라 함께 있던 사람이 좋아서 장소까지 특별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을 저렴하게 바꾸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일도 분명 우정의 즐거움이다. 문제는 그런 소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친구를 만나는 일이 기쁨보다 부담이 되고, 약속을 잡기 전에 통장 잔액부터 확인해야 한다면 우리의 만남에는 너무 많은 조건이 붙어 있는 셈이다.
프렌드플레이션이 씁쓸한 이유는 단순히 밥값과 커피값이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적 형편의 차이가 만남의 횟수를 결정하고, 비용에 대한 부담을 솔직히 말하지 못한 채 가까웠던 사람들이 조금씩 멀어지기 때문이다.
진짜 오래가는 관계는 항상 같은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아니다. 누군가 형편이 어려울 때 만남의 방식과 속도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는 관계다. 비싼 식당에 가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마음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라고 믿어주는 사이 말이다.
물가는 오르고, 삶의 형편은 사람마다 달라진다. 그러나 우정까지 물가에 따라 오르내릴 필요는 없다. 친구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를 함께 썼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사정을 얼마나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어쩌면 프렌드플레이션 시대에 가장 귀한 친구는 많은 돈을 함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돈 때문에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말까지 솔직하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개그맨 겸 방송인 황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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