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의 길 지나 사색의 숲에 안기다

충의공 군위 엄흥도 묘역
단종 시신 수습 일가의 은거지
역사탐방로·옛 간이역 산책도

묘골마을과 한옥 카페
사육신 위패 모신 육신사부터
박팽년 후손이 연 카페 ‘묘운’

대구간송미술관
전형필의 문화보국 정신 계승
지형 살린 절제된 건축 등 눈길

사유원
9개 주제 대규모 복합문화정원
알바로 시자·승효상 작품 전시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사유원은 오래된 나무와 건축 작품이 이루어진 복합문화정원이다. 정희원 기자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사유원은 오래된 나무와 건축 작품이 이루어진 복합문화정원이다. 정희원 기자

올 상반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단종과 충신 엄흥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스크린 속 감동을 대구 역사 여행을 통해 이어갈 수 있다. 군위에는 엄흥도의 묘소로 전해지는 유적이 있고, 달성 묘골마을에는 사육신의 정신을 기리는 육신사가 자리한다.

역사 여행만 있는 게 아니다. 대구에는 자연과 건축, 예술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사유원과 간송 전형필의 문화보국 정신을 잇는 대구간송미술관이 있다. ‘왕사남’이 환기한 충절의 서사에 예술과 사색을 더하면 대구 여행의 결은 한층 깊어진다.

엄흥도의 18대 직계 후손 엄종훈 씨가 엄흥도 묘소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정희원 기자
엄흥도의 18대 직계 후손 엄종훈 씨가 엄흥도 묘소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정희원 기자

◆엄흥도의 마지막 따라… 군위 엄흥도 묘역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는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로 알려진 묘역이 있다. 엄흥도는 조선 단종의 마지막을 지킨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유해진이 묵묵한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는 엄흥도의 면모를 따뜻하게 그려냈다. 그는 왕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외로운 처지에 놓인 단종(박지훈)과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를 보여주며 엄흥도라는 인물을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켰다.

실제 영월 호장이었던 그는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난 뒤 시신 수습을 금한 세조의 명에도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로 엄흥도는 가족과 함께 숨어 지내야 했다. 군위는 그가 은거한 곳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는 지역이다.

현재 군위에 있는 엄흥도 묘소는 영월 엄씨 문중을 중심으로 관리되고 있다. 군위군 역시 관련 연구와 문중 자료 등을 토대로 이곳의 역사성을 알리고 있다.

 

군위 영월 엄씨 문중은 엄흥도가 후환을 피해 둘째 아들 광순과 함께 군위로 들어와 여생을 보냈다고 설명한다. 엄흥도의 18대 직계 후손인 엄종훈 씨는 “문중에 전해 내려온 족보와 구전 기록이 군위 묘소의 근거”라고 말했다.

묘역은 산자락 안쪽에 자리한다. 봉분이 남아 있는 모습은 오랜 세월 묘소를 드러내기 어려웠던 사연을 짐작케 한다. 엄흥도는 조선 숙종 때 영월 창절사에 배향됐고, 고종 때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소 주변에는 ‘충의공 엄흥도 역사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코스다. 인근 화본역을 함께 둘러보는 일정도 가능하다. 화본역은 옛 간이역의 정취가 남아 있는 공간으로, 현재는 열차 운행을 멈췄지만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묘골마을에 자리한 한옥 카페 ‘묘운’은 충효당 곁에 들어선 새 명소다. 정희원 기자
묘골마을에 자리한 한옥 카페 ‘묘운’은 충효당 곁에 들어선 새 명소다. 정희원 기자

◆사육신의 흔적 품은 묘골마을과 한옥 카페

 

왕사남의 서사는 군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에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가 있다.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여섯 충신의 이름이 이곳에 함께 남아 있다.

묘골마을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사육신 사건 이후 박팽년 가문도 멸문 위기에 처했지만, 후손이 극적으로 살아남으며 가문의 맥이 이어졌다.

이곳의 육신사는 본래 박팽년을 기리던 사당에서 출발했다. 이후 다른 사육신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면서 단종을 향한 절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묘골마을의 한옥 카페 ‘묘운’은 박팽년 후손이 운영하는 공간이다. 정희원 기자
묘골마을의 한옥 카페 ‘묘운’은 박팽년 후손이 운영하는 공간이다. 정희원 기자

묘골마을의 또 다른 매력은 고즈넉한 한옥 풍경이다. 마을 안에는 박팽년의 7대손이자 금산군수를 지낸 박숭고가 인조 22년에 건립한 충효당이 남아 있다.

충효당 옆에는 2022년 12월 한옥 카페 ‘묘운’이 문을 열었다. ‘묘골마을의 구름’을 뜻하는 묘운은 박팽년의 22대손인 박상혁 씨가 운영하고 있다. 30대 초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부친이 별장처럼 쓰던 충효당 주변에 자신의 취향을 입혀 마을의 새 명소를 만들어냈다. 역사 답사 후 쉬어 가는 장소로도 알맞다.

◆간송의 뜻 잇는 대구간송미술관

 

충절의 길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예술의 시간이다. 대구간송미술관은 2024년 문을 연 서울 간송미술관의 첫 지역 분관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의 정신을 대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간송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한국 문화사의 핵심 유산을 지켜낸 인물이다. 당시 해외 반출과 훼손 위기에 놓였던 문화재를 사들이고 보존하며 우리 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쳤다. 대구간송미술관은 이러한 ‘문화보국’의 가치를 전시와 교육, 연구로 이어가고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은 노신사가 전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정희원 기자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은 노신사가 전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정희원 기자

미술관은 대구대공원 일대의 경사지형을 살린 건축으로도 눈길을 끈다. 건물은 주변 자연을 억지로 밀어내기보다 지형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화려한 장식보다 절제된 선과 공간감에 집중해, 문화재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

전시 역시 대구간송미술관의 강점이다. 간송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상설전과 기획전이 이어지며, 지류 문화재의 보존 특성상 정기적으로 작품이 교체된다. ‘보이는 수리복원실’도 운영돼 관람객은 작품이 보존·복원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사유원 상부에 자리한 야외 공연장 ‘심포니 6’는 자연의 지형과 풍경을 무대처럼 끌어안고 있다. 정희원 기자
사유원 상부에 자리한 야외 공연장 ‘심포니 6’는 자연의 지형과 풍경을 무대처럼 끌어안고 있다. 정희원 기자

◆숲과 건축이 만드는 사색의 정원, 사유원

 

대구 군위 팔공산 자락의 사유원은 ‘정원’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이름 그대로 생각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이곳은 약 30년에 걸쳐 조성된 대규모 복합문화정원이다. 9개의 주제 정원과 30여 점의 건축 작품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여러 주제의 정원과 국내외 건축가들의 작품이 팔공산 풍경 안에 흩어져 있다. 나무, 돌, 물, 건축물이 서로를 앞세우기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방문객에게 느린 시간을 권한다. 산의 경사를 따라 길이 이어지고, 오래된 나무와 건축 작품, 물길과 돌의 배치가 하나의 동선 안에서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모과나무들이 모여 있는 사유원의 시그니처 공간 풍설기천년.정희원 기자
모과나무들이 모여 있는 사유원의 시그니처 공간 풍설기천년.정희원 기자

이 가운데 ‘풍설기천년’은 세월을 품은 모과나무들이 모여 있는 사유원의 시그니처 공간이다. 사유원의 시작에는 모과나무가 있었다. 유재성 티시(TC)철강 명예회장은 1989년 부산항에서 해외로 빠져나갈 뻔한 고목 네 그루를 접했다. 모두 수백 년 세월을 견딘 나무들이었다. 그는 값을 더 치르면서까지 나무들을 사들였고, 그 선택이 훗날 사유원 조성의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몇 그루의 나무를 지키려는 마음이었지만 점점 오래된 나무를 모으고 가꾸는 일로 이어졌다. 결국 정원을 가꾼지 15년, 지금의 사유원이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사유원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입장 인원을 제한한다. 덕분에 방문객은 붐비는 관광지의 속도에서 벗어나 숲길을 천천히 걸을 수 있다.

사유원의 ‘소요헌’은 빛과 콘크리트, 물의 흐름이 어우러지는 알바루 시자의 대표 건축 공간이다. 정희원 기자
사유원의 ‘소요헌’은 빛과 콘크리트, 물의 흐름이 어우러지는 알바루 시자의 대표 건축 공간이다. 정희원 기자
사유원의 ‘명정’은 위로 오르는 대신 계단을 내려가 닿는 전망대로, 바깥 풍경보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공간이다.
사유원의 ‘명정’은 위로 오르는 대신 계단을 내려가 닿는 전망대로, 바깥 풍경보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공간이다.

건축도 사유원의 중요한 축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알바로 시자의 ‘소요헌’과 ‘소대’,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승효상의 ‘현암’과 ‘명정’ 등이 자연 속에 놓여 있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은 숲과 충돌하기보다 주변 풍경에 스며들며, 건축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경험하게 한다.

사유원 전망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팔공산 자락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정희원 기자
사유원 전망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팔공산 자락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정희원 기자

사유원을 제대로 느끼려면 넉넉한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 둘러보는 관광지라기보다 걷고, 쉬고, 바라보며 머무는 공간에 가깝다. 목련길, 백일홍길, 모과길, 고송길 등 다양한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어 일정과 체력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이곳을 찾았다면 꼭 ‘오만’이라는 화장실을 찾아보자. 탁 트인 시야를 보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일반 건축물로 생각해 넘길 수 있으니 참고해서 꼭 찾아보길 추천한다.



정희원 기자 happy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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