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희의 눈] 떨어진 한국 축구, 필요한 건 위로 아닌 변화

월드컵은 늘 우리에게 묘한 착각을 허락했다. 4년에 한 번쯤은,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조직력이 다를 것이고, 이번에는 세대교체가 성과를 낼 것이고, 이번에는 세계와의 격차가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믿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실망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쉬움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처음에는 참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경기를 곱씹을수록, 32강의 경우의 수가 하나하나 지워질수록 이 감정은 참담함을 넘어 분노로 넘어가고 있다.

 

축구에서 질 수는 있다. 강팀에게 질 수도 있고, 운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심판 판정 하나, 골대 한 번, 부상 한 명이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결과가 더 뼈아픈 이유는 단순히 점수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놓쳤고,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한꺼번에 보여준 경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벼랑 끝에 섰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축구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미 한 번 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아직 뒤돌아설 수 있다. 조심하면 물러날 수도 있고, 버티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떨어진 사람은 다르다. 그때부터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생존이고, 위로가 아니라 회복이며, 말이 아니라 올라갈 힘이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 축구를 이야기할 때 꽤 많은 단어를 써왔다. 투혼, 정신력, 압박, 빠른 전환, 유럽파, 세대교체, 빌드업.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하지만 세계 축구는 이미 그 단어들을 지나 훨씬 더 정교한 단계로 가고 있다. 정신력만으로는 압박을 풀 수 없고, 투혼만으로는 전술의 구멍을 메울 수 없으며, 몇몇 스타 선수만으로는 팀 전체의 구조적 한계를 덮을 수 없다.

 

문제는 선수 한두 명의 실수가 아니다. 감독 한 사람의 책임으로만 끝낼 일도 아니다. 물론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하지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몇 사람을 바꾸고 분노를 소비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또 4년 뒤 비슷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아쉬웠다.”, “조금만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월드컵을 기대해보자.” 이 말들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졌다. 익숙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패배에 익숙해지고, 한계에 익숙해지고, 땜질식 처방에 익숙해지면 참담함마저 일상이 된다. 그때부터는 진짜 위기다. 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져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올라가려면 먼저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의 중심에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세계의 속도에 뒤처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 기술의 문제가 있고, 전술의 문제가 있고, 유소년 시스템의 문제가 있고, 리그 경쟁력의 문제가 있고, 축구를 바라보는 문화의 문제도 있다. 월드컵은 그 모든 문제를 90분짜리 경기로 압축해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번 거울은 잔인했다. 그러나 거울이 잔인하다고 해서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처절하게 떨어졌다면, 이제는 처절하게 올라가야 한다. 그 시작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좋은 선수 몇 명이 아니라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일. 한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10년짜리 축구의 방향을 세우는 일. 여론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바꾸는 일. 그것이 진짜 개혁이다.

 

우리는 축구를 좋아한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관심이 없었다면 참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실망도 없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그 기대가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허탈함 때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예쁜 위로가 아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도 없다.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는 왜 그 최선이 세계의 기준에 닿지 못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열심히 뛰었다면, 왜 열심히만 뛰어서는 부족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패배를 덮는 위로보다, 패배를 파고드는 질문이 필요하다.

 

바닥은 부끄러운 곳일 수 있다. 하지만 바닥은 동시에 다시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공중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떨어지는 중에는 자세를 고치기 어렵다. 완전히 바닥을 인정해야, 그제야 발에 힘을 줄 수 있다.

 

이번 월드컵은 한국 축구에 아픈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참담함과 분노가 단순한 상처로 끝날지, 아니면 다시 올라가는 출발점이 될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분노는 오래가지 않는다. 비판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든다. 하지만 구조를 바꾸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떨어졌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떨어진 자리에서 또 하늘만 쳐다볼 것인가, 아니면 손톱이 깨지더라도 다시 기어 올라갈 것인가.

 

한국 축구가 정말 달라지려면, 이번 참담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패배를 기억해야 한다. 무기력했던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기억해야 한다.

 

월드컵은 끝났지만, 한국 축구의 숙제는 이제 시작됐다. 이번에는 제발, 아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말고 아픔의 원인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다음 4년 뒤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같은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있다.

 

/코미디언이자 방송인 황현희 



신정원 기자 garden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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