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재벌 남자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반향을 일으켰다. 전무후무한 차세계 캐릭터를 탄생시킨 허남준 덕이다. 개성 넘치는 대사들을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한 그에겐 ‘차세대 로코킹’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허남준은 지난 20일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멋진 신세계’에서 악질 재벌 차세계 역을 맡아 임지연(신서리 역)과의 로코를 그렸다. 작품은 지난달 4.1%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기준)으로 출발해 최종화 11.8%를 기록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이자 약 3배의 상승률이다.
첫 로코 주연작으로 뜻깊은 성과를 이뤘다. 허남준은 21일 “작품이 잘 돼서 알아봐 주시는 분들도 많고, 주변에서 연락도 많아졌다. 많은 관심 속에 기분 좋게 살고 있다”라는 종영 소감을 전했다.
◆차세계표 돌직구 대사, 흥행 직감
대본부터 흥행을 직감했다. 작품의 첫인상을 묻자 그는 “대본을 보고나니 작품이 보고 싶어지더라. 내용이 조금 깊어질 것 같으면 바로 산뜻해지고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았다. 막힌 듯하면 바로 시원해지는 설계가 촘촘하게 되어 있는 작품이었다”고 전했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장면들도 잘만 구현해낸다면 재밌을 수밖에 없는 대본이었다. 남산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장면을 언급하고, 임지연이 ‘야인시대’의 김두한으로 변신하는 ‘서리시대’를 연출하는 등 대본과 연출,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시청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차세계에게 주어진 대사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신세계’의 최대 수혜자로 떠오른 허남준의 인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돌직구 대사들이 힘을 불어넣었다. 비난조차 자신을 빛낼 무기로 삼는 ’악질 재벌’로 등장했던 그가 자존심도 버리고 신서리에게 올인했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개나 줘버리고 나랑 두근두근하자”, “지금 저 여자밖에 눈에 안 보인다고!” 등의 돌직구 대사의 말맛을 제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영역의 로코 남주의 등장을 알렸다.
허남준은 “아주 잠깐 한숨이 나긴 했지만 해내면 재밌겠다는 도전의식이 생겼다”며 웃어 보였다. 차세계에겐 극 초반부터 평범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든 대사들이 주어져 있었다. 인물에게 주어진 상황과 대사의 방향성을 먼저 고민하며 다가섰다.
힌트는 지인들의 말투에서 찾았다. 평소 친구들이 쓰는 매력적인 말투들을 귀담아들었다가 차세계에게 투영했다는 그는 “능글거리는 말투에 거부감은 없었다”며 “로맨스 남주치고 너무 직설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비즈니스를 하는 차세계에겐 팩트를 전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래도 되나 싶은 순간에도 작가님이 수위 조절을 잘 해주셔서 매력적인 남자주인공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공을 돌렸다.
허남준이 연기하는 차세계이기에 자신의 모습도 당연히 투영되어 있다. 다만 차세계에 맞춰 극대화 시켜 인물을 그렸다. 그는 “나도 차세계처럼 사람마다 다른 태도로 대한다. 따듯한 사람에겐 한없이 따듯하고, 차가운 사람에겐 더 차가울 때가 있다. 살아오며 가졌던 여러 태도나 감정들을 담았다. 찌질한 모습도 있지만, 최대한 멋진 모습만 담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는 내가 아니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배우 허남준의 재발견’ 요소 중 하나인 중저음의 목소리도 꾸준한 연습의 결과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발성과 딕션에 집중했다. 그는 “소리를 편안하게 내기 위해 애써서 훈련받으며 연습했다. 내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편안하고 부담이 덜 가는 목소리에 대해 연습했다”고 답했다.
◆차세계·신서리, ‘만만치 않은’ 둘의 만남
현대의 악질 재벌 차세계와 조선의 대군 이현을 동시에 연기했다. 같은 얼굴, 다른 시공간의 이현과 단심, 세계와 서리로 이어진 운명은 극의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인물은 의상부터 차별화를 뒀다. 이현이 처소 밖에서 갑옷을 입듯 세계의 전투 의상은 수트였다. 반면 집 안에서는 목이 늘어난 반팔티를 입고 후드를 둘러쓴 평범한 인물이었다.
허남준은 “세계는 어렸을 때부터 사랑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냉혈한으로 살아가다가 뜻밖의 사람을 만나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게 된다. 관계에서 나오는 미성숙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서 “반면 이현은 절제된 어른의 모습이었을 거다. 특별한 표현을 하기보단 위기가 생겼을 때 불안해하지 않고 묵묵히 서리를 지키고 희생을 감수하려는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톤과 디테일을 맞춰 나갔다”고 비교했다.
그런가 하면 초반 차세계의 캐릭터성을 굳히기 위한 까칠한 대사와 상황들이 펼쳐졌다. 극 중 여론의 거센 저항을 받은 차세계는 겉으로 보기엔 악독한 기업 사냥꾼 그 자체였다. 그러나 겉바속촉한 인물의 내면을 알고 있는 허남준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 보면 나쁜 것 같은데, 뒤에선 다 챙겨준다. 작가님이 차세계가 나쁠 수 없게 장치들을 그려주셨다”며 “그러다 보니 까탈스런 말투도 매력적으로 느껴질 거라 믿었다”고 확신을 전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빌런이라고 해도 계속 나쁘게 나타내기보단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캐릭터의) 포인트는 한두 번이면 충분하다”면서 “사람은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런 점들이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나타내준다. (시청자들도) 진짜 이 인물은 어떨까 고민하면 더 좋아해 주시는 거 같다”고 연기 소신을 밝혔다.
‘조선 악녀’ 신서리 캐릭터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허남준은 “신서리도 말투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둘이 만나니 더 재밌었다”라며 웃으며 “신서리 없는 장면은 걱정됐는데, 만나고 나니 점점 케미가 살더라. 자신감을 가지고 차세계의 매력을 뽐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이켰다.
촬영 내내 대박을 점쳤다. 배우들의 합도, 현장 분위기도 유달리 좋았던 작품이다. 임지연, 장승조, 윤병희 등 선배들과 호흡하면서 연기가 늘어가는 재미도 느꼈다. 뜨거운 반응에 책임감도 더욱 강해졌다. 본질에 집중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생겼다.
임지연과의 케미스트리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었다. 임지연에 대해 “아무리 힘들어도 밝은 현장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심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대사에 NG 하나가 없더라. 리허설부터 하나하나 상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는 생각을 했다”며 “서로 장난치고 웃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축복받은 파트너였다”고 감사를 전했다.
◆첫 로코 주연작으로 ‘잭팟’
섬세한 연기력이 필수인 로코의 특성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인물을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차올랐다. 초반엔 작품과 인물의 결을 맞춰가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면, 어느 순간 차세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감정에 서툴고 까칠했던 인물이 사랑을 느끼고 서서히 마음을 여는 등 변화해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탁월한 완급 조절을 펼치며 마성의 차세계를 완성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좋은 글과 연출로 드라마가 잘 되었기 때문에 덩달아 내 연기도 빛을 본 것 같다. 좋은 대사를 열심히 잘 쳤다 정도로 바라봐주시면 좋겠다”고 겸손한 답변을 내놨다.
서로가 캐릭터에 체화되면서 애드립을 해도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 대본을 책 읽듯 가볍게 많이 읽고 난 후에 내 대본을 위주로 보면서 내가 해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는 편이다. 분석을 끝내고 난 뒤에도 촬영장에 가면 많은 생각이 든다”며 “연기할 때도 머리를 많이 쓰고, 끝나도 감독님께 질문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멋진 신세계’의 중반 이후엔 머리(이성)보다 마음이 먼저 가는 순간들이 생겨났다며 “어느 순간이라 콕 짚을 수는 없지만, 몰입감이 더 생겨서 머리를 덜 쓰고 나를 믿게 되더라. 마음이 먼저 가기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그중에서도 차세계의 손목 키스신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내가 봐도 멋진 나’를 꼽아달라는 취재진의 짓궂은 질문에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한 허남준은 손목 키스신을 언급했다. 그는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내가 연기하고 있더라”며 머쓱한 웃음을 보이며 “손목에 키스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음악이 깔리고 편집이 되니까 너무 잘 나왔다”고 만족감을 내비쳤다.
가장 뿌듯한 건 코미디 장면을 잘 살렸다는 평이다. 평소엔 절대 쓰지 않을 것만 같은 대사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뱉을 차세계를 상상하며 준비할 때도 신이 났다고. 그는 “연기하면 스태프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더 뻔뻔하게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면서도 재밌었다. 좋게 봐주셔서 그 점이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데뷔 7년 만에 제대로 빛을 봤다. 허남준은 2019년 스크린으로 데뷔해 드라마 ‘혼례대첩’, ‘스위트홈’ 시리즈를 거쳐 주연작 ‘유어 아너’, ‘지금 거신 전화는’, ‘백번의 추억’ 등으로 필모그라피를 채웠다. ‘멋진 신세계’의 흥행에 이어 차기작에서는 독립운동가로 분한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새 드라마 ‘고래별’은 1926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로 문가영, 최우식과 호흡을 맞춘다.
그는 “‘멋진 신세계’는 내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 보여준 작품이다.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작품에 임하고자 한다”며 “애써 부담감을 없애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최대한 캐릭터가 가진 매력과 내 매력을 맞닿게 표현하고 싶다”라고 바랐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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