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문 앞에 세운 벽 하나가 퀴라소의 월드컵 역사를 바꿨다. 골키퍼 엘로이 룸(마이애미 FC)이 에콰도르의 파상공세를 모두 막아내며 조국에 사상 첫 승점을 안겼다.
퀴라소는 21일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E조 2차전에서 에콰도르와 0-0으로 비겼다. 역대 월드컵 본선 진출국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에 속한다. 2006 독일 대회 당시 한국을 이끌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지휘 아래 처음 본선 무대를 밟았다.
1차전서 독일에 1-7로 대패했던 퀴라소는 1무1패(승점 1점)를 기록했다. 에콰도르와 승점은 같지만 득실차에서 밀려 조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에 이어 두 번째 경기 만에 첫 승점까지 따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주인공은 역대급 선방쇼를 펼친 룸이었다. 에콰도르는 이날 슈팅 28개를 퍼부었고, 이 가운데 15개를 골문 안으로 보냈다. 하지만 룸은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았다.
경기 시작부터 곧장 진가를 드러냈다. 룸은 모이세스 카이세도(첼시)의 침투 패스를 받아 일대일 기회를 맞은 에네르 발렌시아(파추카)의 슛을 막아냈다. 전반 12분 존 예보아(베네치아), 전반 20분 발렌시아의 슛도 연이어 쳐냈다.
후반에도 룸의 선방은 계속됐다. 곤살로 플라타(플라멩구)와 케빈 로드리게스(위니옹), 발렌시아가 가까운 거리서 슛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혔을 정도다. 에콰도르는 후반 44분 앙헬로 프레시아도(아틀레치쿠 미네이루)의 덜 감긴 크로스마저 골대를 때리는 등 끝내 골망을 흔들지 못했다.
룸이 이날 작성한 한 경기 15차례 선방은 관련 기록이 공식 집계된 1966년 잉글랜드 대회 이후 월드컵 역대 2위에 해당한다. 이 부문 1위는 미국 골키퍼 팀 하워드(은퇴)가 2014 브라질 대회서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기록한 16세이브다. 다만 하워드의 기록은 연장전까지 포함된 수치로, 전·후반 90분만 놓고 보면 룸의 15세이브가 역대 최다다.
축구 통계사이트 풋몹은 룸에게 양 팀을 통틀어 가장 높은 평점 9.4점을 부여했다. 미국 매체 ESPN에 따르면 룸은 경기 뒤 “골키퍼로서 거의 완벽한 경기였다”며 “혼자 만든 결과가 아니라 팀 전체가 함께 해낸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퀴라소에 내 동상이 필요할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독일전 대패를 딛고 일어선 선수들을 치켜세웠다. 그는 “우리가 어디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면 자부심만 느낄 수 있다”며 “선수들이 팬들의 응원에 보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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