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영역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나상천 꿈의엔진 대표가 이제 문화산업 전체를 무대로 삼아 새로운 길을 걷는다. 첫 장편소설 출간에 이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제작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도전이다.
서울예대 극작과 출신의 나상천 대표는 1997년 희곡 블랙박스로 창작마을 희곡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03년부터는 대중음악계로 활동 영역을 넓혀 그룹 걸스데이, 모모랜드, 가수 경서 등 아티스트 기획과 마케팅을 총괄했다. 크고 작은 아티스트를 잇따라 시장에 안착시키며 K-팝 분야에서 족적을 남겨온 인물이다. 하지만 본래의 꿈을 다시 찾기로 마음을 먹었고, 첫 장편소설 어느 멋진 도망은 2023∼2024년 두 차례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갔다.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까미난테(Caminante)는 2027년 막을 올린다.
◆K-팝 제작자에서 작가로 돌아오기까지
글로 먹고 사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던 나 대표는 25일 “극단 생활도 해보고 영화사의 시나리오도 써봤지만 너무 배가 고팠다. 글 쓰는 걸 멈추고 현실을 해결하자 싶어 음악 업계에 들어오게 됐다”고 떠올렸다.
생존을 위해 음약·공연계에 몸담았고, 협업 제안이 왔다. 이후 뮤직시티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잘 나가던 싸이월드의 BGM을 제공하던 회사였다. 디지털 앨범 유료화의 바람이 불던 초창기였다. 나 대표는 인기 음원 순위를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분석력과 업계 경험은 아티스트 기획과 마케팅으로 이어졌고,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음악과 동행했지만 단 한 번도 작가의 꿈은 포기한 적은 없었다. 현실에 부딪혀 펜을 놓았을 때도 언젠가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제작에 성공하며 경제적인 여유를 얻었지만 또 한 번 시련이 닥쳤다. 2017년 아내와 사별한 이튿날 어머니도 하늘나라로 떠나면서다. 나 대표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몸으로 마음으로 찾아왔다. 모든 게 무너졌다”고 담담하게 털어놨다. 두 다리로 서 있기조차 힘든 시기였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다. 홀로 양육해야 할 어린 딸이 있었다.
마음의 병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보다 못한 지인의 권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게 됐다. 순례길은 스페인 북부를 가로질러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약 800㎞의 도보 순례 코스다. 매년 전 세계에서 30만명 이상이 완주에 도전한다.
끌려가다시피 떠난 여정은 시작부터 혹독했다. 나 대표는 “죽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귀국행 비행기 표를 찾기 시작했지만 동행이 ‘며칠만 쉬었다 다시 가보자’라고 제안했고, 포기하기 직전의 이 기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며칠의 휴식 동안 만난 스페인 부부가 해준 이야기가 큰 울림을 줬다. 그들은 나 대표에게 “이 길은 너를 위한 길이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걷고 싶은 대로 걸어. 걷다보면 비로소 네가 누구인지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네 옆에 누가 있는지도 보게 될 거야”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길을 걷기 시작해 첫 번째 순례길을 완주할 수 있었다.
걷다 보니 주변이 보였다. 함께 걷고 있는 선배가 보였고, 3일 차에 밴드를 챙겨준 여행자가 있었다. 6일 차에는 만난 이는 복통을 달랠 약을 건네줬다. 포기하려던 순간 다시 일으켜 준 동력이었다. 순례길에서 돌아오고 나니 ‘꿈꾸던 길’로 돌아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나 작가는 “먹고 사는 게 해결되면 (작가로)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55세 이전에는 반드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올해로 54세가 됐다. 생각하던 시기에 돌아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멋진 도망’, 33일 순례길의 여정
‘어느 멋진 도망’은 순례길 800㎞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네 인물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과 상상을 결합한 팩션(faction) 장르다. 실제로 만난 인물의 면면을 소설에 담았다. 아내를 잃고 요리사로 새 삶을 시작한 중년 셰프 킴스, 오디션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싱어송라이터 지망생 도로시, 불가능에 가까운 구독자 33만명 미션을 수행 중인 유튜버 로저, 무거운 비밀을 안고 길 위로 숨어든 스물한 살 청년 준상의 이야기다. 이들이 33일간 같은 길을 걸으며 각자 도망쳐온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와 변화를 맞이하는 과정을 담았다.
나 대표는 “걸으면서 진짜 나를 만났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들까 생각하다 보니 죽음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집어삼켰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남은 이들과는 어떤 이별을 맞아야 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나 대표는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딸을 걱정한다고 변할 건 없더라. 그 아이의 길이자 그 아이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언젠가 딸도 지금의 나처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겠지 믿고 나니 걱정과 근심이 사라졌다. 행복하게 완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무대로, 여정은 계속된다
어느 멋진 도망은 정식 출간 전부터 밀리의 서재 주간·월간 톱 10을 기록했다. 지난 2월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 뮤지컬 까미난테 쇼케이스를 열고 첫선을 보였다. 대사 대부분을 뮤지컬 넘버 가사로 구성한 송스루 뮤지컬(Song Through Musical) 형식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순례길의 여정을 딸에게 전하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이 뮤지컬화의 동력이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배움의 시간을 무대 위에서 들려주고 싶었다. 나 대표는 “딸이 춤과 노래를 좋아해 뮤지컬로 제작하면 극장에서 들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본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플랫폼 다변화로 공연장을 향하는 발길이 줄어든 현실을 고려한다면 또 한 번의 도전이다. 나 대표는 “어려운 현실인 걸 알고 있다”면서 “지금의 문제와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고민을 같이 느끼고 이해하면서 위로받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힘이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출사표를 던져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음악 하던 사람이 뮤지컬 시장에 노크하는 것이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이 되길 바란다.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나의 몫”이라고 부연했다.
나 대표는 K-팝 분야가 아닌 문화·예술계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비록 이제 작은 씨앗을 뿌렸지만, 그 씨앗이 자라 숲이 되는 꿈을 꾼다. 모든 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꿈을 이뤄가고 있는 과정이다. 책과 음악이 나오고, 뮤지컬과 연극·영화가 나올 때까지 하나씩 열매를 맺고 싶다”고 바랐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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