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페퍼저축은행이 여자 프로배구단 창단 5년 만에 매각이라는 파국을 맞았다. 5년 안에 최고의 구단을 만들겠다는 호기로운 외침은 초라한 성적표만 남긴 채 모기업 적자로 문을 닫게 됐다. 이 자리를 빈자리를 인터넷 방송 플랫폼 기업인 SOOP(숲)이 메우려 하고 있다. 무거운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17일 한국배구연맹(KOVO)에 따르면 SOOP이 페퍼저축은행 인수 의향을 밝히고 V리그 가입을 위한 막바지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르면 이번 주 임시 이사회를 열어 가입을 확정 짓는다는 계획이다. SOOP이 이사회를 통해 페퍼저축은행 인수를 완료하면 프로배구 여자부는 7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문제는 가입 조건이다. 앞서 KOVO와 SOOP은 창단 시 제출해야 할 가입회비와 특별발전기금을 두고 이견을 보였다. KOVO는 신생팀 기준의 20억을 제안했지만 SOOP은 거절했다. 이에 KOVO는 SOOP과의 조율 과정에서 금액을 하향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7개 구단 체제 붕괴를 막으려는 KOVO의 절박함이 배려로 이어진 셈이다.
KOVO의 가입회비·특별발전기금 햐항 조정은 당장의 팀 해체 위기를 막을 수 있겠으나, 장기적인 운영 의지와 책임감을 담보할 최소한의 장치마저 허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언제든지 손쉽게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정거장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며 “페퍼저축은행처럼 경영이 어려워지면 곧바로 손을 떼는 사례가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관계자는 “V리그는 가입회비가 타 프로 스포츠와 비교해 적은 수준”이라며 “그렇다면 인수 기업도 특별발전기금을 통해 진심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그의 질적 하락도 무시할 수 없다. KOVO는 선수 일자리 및 신인 육성 확대, 리그 흥행 지속 등을 위해 지난 2021년 9월 페퍼저축은행을 창단했다. 그러나 창단 첫해 3승을 시작으로, 줄곧 꼴찌를 면치 못했다. 이번 시즌에야 간신히 탈꼴찌에 성공했을 뿐이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신생팀의 존재가 오히려 리그 전체의 수준을 낮췄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새롭게 재탄생할 구단의 미래 역시 안갯속이다. 장소연 감독 등 기존 코칭스태프와 사무국 직원들의 고용 승계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박정아, 이한비 등 팀의 주축 선수들도 이탈했다. 이뿐만 아니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까지 불참하면서 암울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팀의 숫자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운영 의지다. KOVO가 7개 구단 체제 유지에 급급해 문턱을 낮추는 데만 집중할 경우 배구팬들은 페퍼저축은행과 같은 모습을 반복해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제2의 페퍼저축은행을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한편, 연고지는 기존 광주광역시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페퍼저축은행과 광주광역시의 연고지 협약이 지난 12일 만료됐다. 새로운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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