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희의 눈] 가정의 달, 따뜻한 이름 뒤에 숨은 피로

5월은 참 이상한 달이다. 이름은 분명 ‘가정의 달’이다. 말만 들으면 따뜻하다. 가족이 서로를 돌아보고, 아이의 웃음을 보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고마운 마음을 나누는 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5월이 시작되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달력은 따뜻한데, 카드 명세서는 차갑다. 마음은 훈훈한데, 통장은 으슬으슬하다. 가정의 달이라는데, 정작 가정을 챙기는 사람들은 1년 중 가장 바빠진다.

 

어린이날이 오면 아이를 즐겁게 해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선물도 알아봐야 하고, 어디를 데려갈지도 정해야 한다. 놀이공원은 사람이 많고, 키즈카페는 예약이 어렵고, 외식 장소는 이미 꽉 차 있다. 집에 있자니 미안하고, 나가자니 무섭다.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인데, 현실은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체력이 빠진다. 아이는 신났고, 부모는 이미 오전 11시에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쓴다. 어린이날은 아이들의 날이지만, 부모에게는 체력장이다.

 

그다음은 어버이날이다.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려야 할지 고민이 시작된다. 용돈을 드려야 하나, 선물을 사야 하나, 식사를 예약해야 하나. 카네이션 하나로 끝내기에는 마음이 걸리고, 너무 크게 하자니 지갑이 운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하시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자식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말은 대체로 “너의 형편에 맞게, 그러나 성의는 보이도록 하라”는 고도의 압축 언어다. 가족 간의 말은 늘 번역이 필요하다.

 

스승의날도 있다. 예전처럼 큰 선물을 주고받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줄은 전해야 할 것 같다. 아이가 있다면 선생님께 어떻게 감사의 뜻을 전할지도 고민된다. 여기에 부부의날까지 있다. 사실 부부는 5월 내내 서로를 가장 많이 본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의 지친 얼굴을 본다. “어디 갈까?” “뭐 먹을까?” “부모님은 언제 뵐까?” “아이 선물은 샀어?” “예약했어?” “차 막히겠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부부의날에는 이미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쉬고 싶어진다. 부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때때로 꽃다발이 아니라 각자의 침묵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5월은 사랑의 달이라기보다 일정 조율의 달에 가깝다. 가족을 챙긴다는 말은 생각보다 많은 노동을 포함한다. 선물을 고르는 노동, 식당을 예약하는 노동, 이동 동선을 짜는 노동, 분위기를 맞추는 노동, 사진을 찍는 노동, 혹시 누가 서운하지 않을지 살피는 감정 노동까지. 겉으로는 화목한 가족 행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준비가 들어 있다. 누군가는 계속 운전하고, 누군가는 계속 검색하고, 누군가는 계속 계산하고, 누군가는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한다.

 

물론 가족을 위한 일이 싫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니까 하는 일이다. 아이가 웃으면 힘들어도 기분이 좋고, 부모님이 좋아하시면 돈이 아깝지 않고, 가족이 함께 앉아 밥을 먹는 순간에는 그래도 이게 사는 맛인가 싶다. 문제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점점 더 많은 소비와 일정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마음인데, 어느 순간부터 예약 확인 문자와 카드 결제 알림으로 증명되는 것 같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 “결제되었습니다”라는 문자가 먼저 오는 달, 그게 5월이다.

 

가정의 달이 정말 가정을 위한 달이라면, 조금은 덜 부담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아이에게 꼭 비싼 선물과 화려한 하루가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부모님께도 꼭 비싼 식사와 큰 용돈만이 효도는 아닐 수 있다. 배우자에게도 근사한 이벤트보다 “오늘은 내가 할게”라는 말 한마디가 더 큰 선물일 수 있다. 가족이란 결국 멋진 장소에서 찍은 사진보다, 서로의 피로를 먼저 알아봐주는 관계에 가까울지 모른다.

 

우리는 5월을 보내며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엔가 가야 하고, 무엇인가 사야 하고, 누구에게든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면 진짜 필요한 것은 조금 덜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선물을 줄이는 대신 대화를 늘리고, 외식을 줄이는 대신 편안한 시간을 만들고, 행사를 줄이는 대신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정의 달은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

 

가족을 챙기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가족을 챙기느라 가족 안의 누군가가 계속 지쳐 있다면, 우리는 한번쯤 물어봐야 한다. 지금 이 가정의 달은 정말 누구를 위한 달인가. 아이를 위한 달인가, 부모님을 위한 달인가, 아니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시간과 돈과 체력을 조용히 끌어다 쓰는 달인가.

 

5월이 끝나갈 때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이번 달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다. 가정의 달을 보냈는데, 가정 안의 사람들은 쉬지 못했다. 그래서 5월에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야 할 말은 어쩌면 거창한 감사 인사보다 이런 말일지 모른다.

 

“이번 달 고생 많았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피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정의 달이 우리에게 남겨야 할 가장 현실적인 숙제다. 선물은 사라지고, 꽃은 시들고, 카드값은 다음 달에 또 오겠지만, 누군가 내 수고를 알아봐줬다는 기억은 의외로 오래 남는다. 가정의 달이 진짜 누군가를 위한 달이 되려면, 사랑을 더 크게 쓰기보다 서로의 피로를 더 작게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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