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여자 배구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선수들이 서로 오고 싶어 하는 팀을 만들겠다.”
호기로웠던 외침, 딱 5년 만에 공염불이 됐다. 2021년 9월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7번째 구단으로 창단한 페퍼저축은행이 해체 위기에 직면했다. 모기업 재정난으로 배구단 매각 절차를 밟고 있으며, 인수 의향이 있는 기업을 물색하고 있다.
페퍼저축은행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특수’를 누렸다. 불확실성 증대로 1금융권이 문을 잠그면서 중·저신용자와 어려움을 겪던 자영업자들이 저축은행으로 몰렸고, 고금리 대출이 확대되면서 호황기를 누렸다. 페퍼저축은행 역시 2021년 영업이익 1000억원을 넘어설 정도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특수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 맞물리며 2023년 1073억원의 당기순손실을 시작으로 모기업은 3년 연속 적자에 빠졌다. 지난해 2차례 희망퇴직을 시행했을 정도다.
애초 페퍼저축은행이 배구단을 창단할 때 이 부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컸다. 코로나19 시기 갑자기 성장한 기업인 만큼 장기간 안정적인 운영이 어려울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물론 남자부에도 저축은행 구단이 있다. 남자부 OK저축은행이다. 하모기업을 비교하면 체격과 체력 모두 급이 다르다. OK저축은행은 저축은행 업계 선두 기업이다. 자산 규모만 13조원대다. 충당금은 물론 금리충격의 흡수력 자체가 다르다. 실제 페퍼저축은행이 최근 3년간 적자에 빠져있을 때도 OK저축은행은 흑자를 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물론 기업의 성장과 쇠퇴는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구단은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창단 시절의 창단 시절의 간절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떠날 준비만 하고 있다. 책임감 있는 행동이 동반되지 않고 있다. 페퍼저축은행을 최고의 구단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장 매튜 페퍼저축은행장은 최근 사퇴했다. 모기업은 구단을 다른 기업에 매각하겠다는 생각뿐이다. V리그 운영에 미치는 악영향, 실망한 배구팬들에게 대한 최소한의 사과도 없다.
팀을 위해 헌신하던 선수들도 피해자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달 30일부로 지난 시즌까지 팀을 이끌던 장소연 감독을 비롯한 모든 코칭스태프, 사무국 직원들과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번 달부터 차기 시즌 준비를 위한 공식 훈련을 시작해야 하지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7일부터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외인 트라이아웃에도 불참한다.
이름값 있는 선수들은 이미 다른 구단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않고 프로에 뛰어든 신인급 선수들이나 구단에 남겨진 선수들은 선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한국배구연맹(KOVO) 역시 이번 사태를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 지난 시즌 V리그 남녀부 총관중은 63만5461명으로, 사상 처음으로 63만명을 돌파했다. 특히 여자부 평균 시청률은 1.36%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번 페퍼저축은행 매각 사태가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V리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질적 팽창도 중요하지만, 양적 팽창도 반드시 동반돼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신규 구단 창단을 쉽게 허가하면 페퍼저축은행 사태와 같은 부작용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 기득권 계층을 상징하는 뷰캐넌 부부는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고를 저지른 뒤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안전한 세계로 도망간다. 책임 회피가 용인되는 순간, 사회의 기준은 무너지고 잘못의 대가는 약자에게 전가된다. 결국 공정과 신뢰는 붕괴되고, 무책임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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