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대한민국에서 가장 뜻밖의 스타는 정치인도, 연예인도, 야구선수도 아니었다. 늑대였다. 이름도 묘하게 정겹다. 늑구.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름부터 이미 반쯤은 국민 캐릭터였다. ‘늑대’라고 하면 어딘가 무섭고 야성적인데, ‘늑구’라고 부르면 갑자기 동네 동생 같다. “늑구야 밥 먹었냐?” 하고 부르면 뒤돌아볼 것 같은 이름이다.
대전 오월드에서 늑구가 탈출했다. 처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걱정이었다. 늑대가 동물원을 빠져나왔다니, 이건 귀여운 뉴스로만 볼 수는 없다. 시민 안전도 중요했고, 혹시 모를 사고도 염려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사람들은 늑구를 무서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발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 “늑구도 얼마나 놀랐겠냐” 이런 반응들이 이어졌다.
참 묘한 일이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늑대에게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했다. 물론 늑대는 늑대다. 야생성이 있고, 위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늑구를 단순한 ‘위험 동물’로만 보지 않았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존재, 우연히 밖으로 나와버린 존재, 그리고 인간의 실수 때문에 갑자기 세상의 관심 한복판에 놓인 존재로 바라봤다.
늑구는 지난 8일 오월드를 빠져나간 뒤 9일 만에 생포됐다. 포획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에는 거의 귀환 환영식 같은 반응이 올라왔다. “무사귀환 환영”, “집 나가면 고생이다”. 누가 보면 해외 원정 다녀온 국가대표 선수인 줄 알겠다. 늑구 입장에서는 “나는 그냥 구멍이 있길래 나갔을 뿐인데 왜 온 국민이 나를 보고 있지?”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늑구 대소동이 웃긴 이유는 사건 자체가 가벼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꽤 심각했다. 동물원 안전관리 문제였고, 시민 불안 문제였고, 동물 보호 문제였다. 정부도 오월드에 재발 방지책 마련을 지시했고, 안전관리 현황 점검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웃음만으로 넘길 일은 아니다. 다만 그 무거운 문제를 사람들이 처음 받아들인 방식이 너무 인간적이었다. 우리는 늑구를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늑구에게 이상한 친근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이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요즘 너무 많은 갈등과 분노 속에 산다. 뉴스만 켜면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정치 뉴스는 늘 뜨겁고, 경제 뉴스는 늘 무겁고, 사회 뉴스는 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늑구가 나타났다. 사납지만 어딘가 짠하고, 위험하지만 왠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게 되는 존재. 사람들은 잠시나마 서로 다른 편을 나누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도 살려서 데려와야지”. 이게 늑구 대소동의 이상한 힘이었다.
사람들은 늑구에게서 자유를 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늑구가 정말 자유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늑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본다 해도 대답은 “아우우우” 정도일 것이다. 통역이 어렵다. 다만 인간은 늘 자기 마음을 다른 존재에게 비춰본다. 갇혀 있던 동물이 밖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그 동물의 사정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답답함을 떠올린다. 나도 어디론가 훌쩍 나가고 싶다. 나도 정해진 울타리 밖으로 한번 나가보고 싶다. 나도 누군가 정해놓은 스케줄 말고, 내 발로 방향을 정해보고 싶다.
그래서 늑구는 잠깐 동안 우리의 대리 탈출자였다. 물론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다. 동물원 밖 세상은 늑구에게 자유로운 초원이 아니었다. 낯선 도로, 수색 인력, 드론, 마취총, 굶주림,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라면 늑구가 산맥을 넘어 새로운 늑대 무리를 만나고, 배경음악이 웅장하게 깔렸겠지만, 현실의 늑구는 며칠 만에 체력이 떨어졌고 결국 다시 돌아왔다. 말하자면 늑구의 탈출기는 자유의 서사라기보다 생존의 소동에 가까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늑구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늑구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았고, 늑구 역시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크게 상처 입지 않고 끝난 사건은 요즘 세상에서 생각보다 드물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크게 다치고 나서야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행히 늑구가 살아 돌아왔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이 사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늑구에게 감정이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 같으면 탈출한 맹수는 곧바로 ‘위험’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시민들이 먼저 생포를 바랐다. 불안하면서도 죽이지 않기를 바랐다. 안전을 원하면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건 작은 변화다. 하지만 꽤 중요한 변화다. 사회가 조금씩 더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회는 감정이 없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여러 감정을 동시에 견디는 사회다. 무섭지만 불쌍할 수 있고, 위험하지만 살리고 싶을 수 있고, 웃기지만 책임을 물어야 할 수 있다. 늑구 사건은 바로 그 복잡한 감정의 시험지였다. 다행히 시민들은 꽤 괜찮은 답을 적었다. “무섭다, 그래도 살려야 한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안전과 생명, 공포와 연민이 함께 들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에게도 작은 늑구가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표정을 짓고, 정해진 말투로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울타리 밖이 궁금해진다. 지금 내가 사는 방식이 전부일까.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 나도 한번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대부분은 실행하지 않는다. 카드값이 있고, 일정이 있고, 가족 단톡방이 있고, 다음 날 녹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늑대보다 더 단단한 울타리에 산다. 이름하여 책임감이다.
늑구는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돌아오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늑구를 보며 웃고, 걱정하고, 안도했다. 잠깐의 소동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 이유는 늑구가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다. 늑구가 우리 안의 어떤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고 싶은 마음, 누군가 나를 위험한 존재로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늑구 대소동은 끝났다. 세상은 가끔 늑대 한 마리 때문에 조금 다정해질 수 있다.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존재에게도 이름이 붙으면 우리는 그를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늑구야, 고생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은 사실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의 짧은 탈출이 갇혀 있던 우리의 마음을 잠깐 산책시켜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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