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메디컬이 성공하려면 의료기술 수출로 끝나선 안 됩니다. 현지에서 스스로 돌아가는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의료기술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을 남겨야 진짜 현지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수찬 힘찬병원 대표원장)
부하라 힘찬병원이 개원 6년 만에 현지 의사를 병원장으로 임명했다.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약 580㎞ 떨어진 도시다. 우리에게는 관광 인프라가 풍부한 고도로 익숙하지만, 현지에서는 ‘한국 병원’이 있는 지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이곳에 문을 연 부하라 힘찬병원은 약 2700평, 100여 병상 규모로 설립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 의료진이 최신 의료기술로 환자를 진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그동안 병원은 한국 의료진이 정기적으로 현지를 방문해 수술과 진료를 주도하는 구조로 운영돼 왔다. 현지 의료진 역시 함께 참여했지만, 핵심 진료는 한국 의료진 중심으로 이뤄진 측면이 있었다.
이번 병원장 선임을 계기로 구조는 달라지고 있다. 현지 의료진이 병원 운영과 진료의 중심에 서면서 병원은 자립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의대의 경우 기초 의학교육은 이뤄지고 있지만, 수술 경험과 장비 접근성이 제한된 구조가 한계로 지적돼왔다. 이런 환경에서 의료 인력을 키운다는 것은 현장의 기초를 다시 쌓는 일에 가까웠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현지 의료의 기준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이어졌다.
이수찬 대표원장의 우즈베키스탄 진출은 의료기술 전수에 머물지 않았다. 이를 현지에 지속할 수 있는 인재와 시스템을 구축했다. 한국식 의료를 배우던 의사가 병원의 최고 책임자로 올라서며 K-메디컬이 수출 단계를 넘어 현지화에 안착했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소 다리로 연습하던 의사”… 현지 의료진, 병원 이끌다
부하라 힘찬병원은 최근 마르다노브 잠시드를 병원장으로, 압둘라예브 이슬롬을 부병원장으로 선임했다. 새로운 병원장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수찬 힘찬병원 대표원장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
신경외과 의사인 잠시드 병원장은 부하라 지역에서 이름만으로도 통하는 저명한 의사의 아들이다. ‘잠시드 의사’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처럼 통할 정도로 지역 내 영향력이 있는 인사다.
잠시드 신임 병원장은 “힘찬병원 의료진들은 부하라 의료진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는 존재”라며 “병원장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자리인 만큼, 병원 가족들과 함께 부하라 힘찬병원을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부병원장이자 이슬롬은 1993년생 젊은 정형외과 의사다. 그는 한국 의료진들로부터 연수를 받은 뒤 술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우즈베키스탄 의료 환경상 실습 기회가 제한적인 만큼, 실제 수술 경험을 쌓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슬롬 부병원장은 관절경 수술을 익히기 위해 소 다리를 가져와 연습할 정도로 집요하게 기술을 익혀왔다.
이슬롬 부병원장은 “병원은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시스템”이라며 “이수찬 대표원장의 신뢰에 부응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연수·협진·현장 경험… 현지 의료진 성장 이끈 시스템
척박한 의료현장 속 현지 의료진들의 성장은 우연이 아니다. 힘찬병원은 부하라 병원 소속 의료진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의료기술과 병원 운영 시스템을 전파해왔다. 2022년부터는 현지 의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수술기법과 병원 경영 시스템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한국 의료진들도 우즈베키스탄을 찾을 때마다 하루에 50명 내외의 외래 환자를 봤다. 수술도 5~6건 이상 진행하며 현지 의료진들을 가르쳤다. 이와 함께 한국 전문의와의 원격 협진 시스템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도록 했다.
그 결과 현지 의료진이 독립적으로 진료와 시술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곳 의료진들은“한국 원장님들께 배웠던 비법을 토대로 환자들을 돌보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다른 병원들도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처럼 빠르지 않다”며 “다른 의사들은 대체로 연수를 1년에 한 번 받지만, 우리는 수차례 받고 있다는 점도 비교가 안 되는 부분”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실력 있는 의료진 양성… ‘의사 키우는 구조’
힘찬병원의 우즈베키스탄 진출은 의료 지원이나 자선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 현지 의료진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해 자국 의료 시스템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의료 환경은 현실적으로 열악하다. 이 대표원장은 “현지 의대에서는 해부 실습에 필요한 카데바 확보가 어려워 마네킹 중심의 제한적인 교육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며 “의대들의 초청으로 이를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임상 역량을 키우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는 셈”이라고 돌아봤다.
이 대표원장이 수많은 의대들과 협업해 실습 기회를 늘리고, 현지에 없는 물리치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다.
힘찬병원은 최근에도 부하라 지역 사립대학인 자르메드대학교와 의료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자르메드대학은 비교적 현대적인 교육 시설과 임상 교육 기반을 갖춘 지역 거점 대학으로 평가받는다. 힘찬병원은 협약을 통해 학생들에게 실습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의료 인력 양성 구조를 함께 설계해나간다는 포부다.
이 대표원장은 지난달 31일 이곳 의대생 250여명을 대상으로 강의에 나섰다. 강의실을 꽉 채운 학생들은 강의 내내 높은 집중도를 보였다. 이 대표원장은 “학생들이 실제 의료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 나가겠다”며 “이 경험이 학생들과 지역 의료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70년대 수준 의료환경… “사람 살리는 병원”에서 시작
이번 여정에 함께하며 이 대표원장에게 “왜 우즈베키스탄이었는지” 물었다. 이 대표원장은 이에 대해 2017년 사브카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방한 당시 보건부 장관이 부평힘찬병원을 방문해 진출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고 답했다.
당시 이 대표원장은 수차례 현지를 방문하며 의료 환경을 직접 확인했다. 병원 착공까지 한국과 부하라를 100여 차례 오갔다. 거리로 따지면 지구 43바퀴다.
이 대표원장이 진출을 결심한 것은 당시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난 뒤였다. 당시 박혜영 상원의료재단 이사장(내과 전문의)도 함께했다.
그는 “원내에 기본적인 모니터링 장비, 심지어 인공호흡기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며 “환자식 개념도 없어 보호자가 가져온 도시락이 병실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감염 관리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의료보험 제도 역시 없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없는 환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 대표원장은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의료 수준이 1970년대 한국과 비슷하다고 느꼈다”며 “이곳에서 사람을 살리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혜영 이사장도 여기에 크게 공감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병원 하나가 기준을 바꿨다”… 부하라 의료환경의 변화
부하라 힘찬병원이 들어선지 6년, 현지 의료환경은 긍정적으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우선 원내에는 MRI를 비롯해 슬링치료, 멀티스파인, CPM 등 한국과 동일한 수준의 물리치료 장비가 도입돼 있다. 장비에 대한 눈높이뿐 아니라 병원을 운영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큰 전환점이 됐다. 이크볼라 이마볼라 부하라 힘찬병원 행정총괄은 현지의 긍정적 변화에는 힘찬병원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부하라 힘찬병원이 그동안 현지 의료기관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에서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 현지에서는 이를 적극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소한 변화가 기준이 된다”… 현지 의료를 바꾼 디테일
2년 전 부하라 시립병원을 방문했을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은 놀랄만한 요소들이 꽤 많았다. 현지 병원이 자랑하는 요소들도 이미 한국에서는 보편화된 부분들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2년만에 찾은 현지 병원의 환경 자체가 크게 개선됐다.
가장 먼저 감지된 변화는 ‘의료 서비스의 태도’다. 기존 우즈베키스탄 의료는 진료 자체에는 집중하지만, 환자 경험까지 고려하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힘찬병원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바꿨다. 매월 우수 직원을 선정해 포상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의료진의 응대 방식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근무 중인 11명의 의사들 역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체득했다.
실제 현지 병원 리뷰에는 “실력은 기본이고 친절해서 좋다”는 평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의료 수준을 넘어 ‘경험’이 달라졌다.
◆환자복·침대·식사까지… ‘병원의 기본’이 달라졌다
병원 환경의 변화는 더욱 직관적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5년 전만 해도 환자식 개념이 없어 보호자가 도시락을 가져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환자복이나 의료용 침대 역시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감염관리 면에서도 취약했다.
힘찬병원이 환자복과 병원용 침대, 환자식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이러한 환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우선 인근 병원들이 환자복과 침구를 도입하는 등 변화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병원용 베개나 환자복을 별도로 구매하고 싶다는 환자들까지 나타나며 인식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병원이 갖춰야 할 기본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환자 중심의 동선 설계 역시 현지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기존 현지 병원들은 진료, 검사, 치료 공간이 분산돼 있어 환자들이 병원 곳곳을 이동해야 하는 구조였다. 특히 관절 질환 환자들에게는 이동 자체가 부담이 됐다.
반면 부하라 힘찬병원은 1층에 외래 기능을 집중 배치하고 병실과 치료 공간을 효율적으로 연결해 ‘덜 걷게 만드는 병원’ 구조를 구현했다. 복도에 설치된 안전바 역시 환자를 생각한 설계로 만족도가 높았다.
이들 요소는 모두 우즈베키스탄 보건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인근 지역뿐 아니라 부하라 힘찬병원을 방문한 현지 의료진과 관계자들이 한국식 병원 운영 방식을 참고해 자국 병원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일종의 새로운 의료 ‘표준’이 형성되는 흐름이다.
◆청소 카트 하나까지… 현장을 바꾼 작은 차이
눈에 띄지 않는 변화도 이어졌다. 한국식 청소 카트 도입이 대표적이다. 기존에는 미화 직원들이 양동이와 청소 도구를 양손에 들고 이동했지만, 카트를 도입하면서 업무 효율과 위생 관리가 동시에 개선됐다.
이크볼라 총괄은 “한국식 청소 카트는 현지 병원에서는 볼 수 없던 방식”이라며 “작은 변화지만 현장 반응은 확연히 다르다. 미화 직원들은 업무 동선이 편해지고 노동 강도가 줄어들면서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입을 모은다”고 전했다.
이어 “실제로 병원 내 근무 환경이 알려지면서 미화직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도 늘고 있다”며 “우리 병원은 온수 공급도 안정적이고, 같은 미화직이라도 근무 환경 자체가 다르다고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첨단 의료 기술의 전수는 물론 병원의 일상을 지탱하는 작은 시스템들이 모여 부하라 의료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있었다.
◆K-메디컬 알리는 거점으로 확장… 중앙아시아 환자 몰린다
현재 부하라 힘찬병원은 자연스럽게 인근 국가에까지 K-의료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신뢰가 환자 유입의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병원이 일종의 의료 안전망으로 기능하는 중이다.
환자 유입은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타지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인접 국가에서도 환자들이 병원을 찾고 있다. 병원은 점차 중앙아시아 권역 단위의 의료 거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의료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환자를 끌어들이는 ‘자생형 의료관광 거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지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도 질병이나 부상 등 응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이 병원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힘찬 가자”로 통한다… 태극기 아래 쌓인 신뢰
부하라에서 힘찬병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택시 기사들에게 ‘힘찬’이라고 이야기하면 바로 알아듣고 목적지로 향한다. 심지어 올드시티 내 가게들에서도 ‘힘찬 칭찬’에 나서는 현지인이 많다. 한 상인은 이번에 힘찬병원을 찾으러 왔다고 하자 “아내가 힘찬병원에서 근무 중”이라며 “정말 좋은 병원이다. 오래오래 일했으면 좋겠다”라며 기분 좋게 할인을 해주기도 한다.
부하라 힘찬병원 한가운데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현지에서 태극기는 하나의 신뢰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대표원장은 “한국 의료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는 공간이라는 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외관에 태극기를 그렸다”며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국기를 내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부하라) 글·사진=정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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