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튜브 유명 ‘술방(술 마시는 방송)’ 채널인 짠한형에 출연한 배우 이영애는 파도타기를 권하는 MC 신동엽에게 뜻밖의 부탁을 건넸다. 음주 경고 자막을 길게 내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영애는 “아이들이 ‘마시면 재밌을까’라고 생각할까 걱정된다”며 “아이들이 경고 문구를 오래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한민국 최초 여성 소주 모델이 이제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술 권하는 미디어를 향해 던진 한마디였다.
영상 속 연예인들은 취기에 기대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웃음소리는 점점 커진다. 맛깔스러운 안주가 차려진 술방은 단순한 예능을 넘어 어느새 시청자의 술친구가 됐다. 하지만 솔직함으로 포장된 친근한 풍경의 이면엔 무서운 파급력이 숨어 있다.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음주 미화 콘텐츠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할 때다.
◆술 권하는 미디어, 유명무실 심의 규정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TV 방송 음주 장면 모니터링 현황에 따르면 2020∼2024년 5년간 시청률 상위 드라마·예능 556개 프로그램 중 무려 88%(488개)에서 음주 장면이 등장했다. 세부적으로는 총 1만1587편 중 6558편(56.6%)에서 음주 장면이 나왔고 노출 횟수는 1만2018회에 달했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8조와 제45조는 방송이 음주를 미화하거나 조장해서는 안 되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이 잘못된 음주 문화를 인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규정에 따라 적발된 문제 음주 장면 86건 중 88%에 달하는 76건이 ‘문제없음’ 판정을 받았다. ‘문제 음주 장면’이란 술에 대한 긍정적 묘사, 미성년자 음주 조장 장면 등을 뜻한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심의 규정은 사실상 허울뿐이다.
특히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경우 사정이 더 심각하다. 2023년 업로드된 콘텐츠 100편 중 82편에서 음주 장면이 등장했고 편당 노출 횟수는 3.4회로 TV 방송보다 높았다. 유튜브나 개인 SNS는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최근 술방이 더욱 확산된 점을 감안하면 현재는 온갖 화면에서 음주 장면이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짠한형의 수습 불가 ‘술부심 잔치’
2023년 론칭된 짠한형은 연예계 대표 주당 신동엽을 내세운 음주 토크쇼다. 구독자만 208만 명, 상위 4개의 영상 조회 수만 3000만 회를 넘어선 히트 콘텐츠다.
베테랑 MC 신동엽의 현란한 말솜씨가 유튜브와 만나 독보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방송 수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그의 진행 기술에 술자리 분위기가 더해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예능에서 보기 힘든 톱스타들의 출연이 있는 반면, 신동엽의 술친구들의 출연도 잦다.
이 가운데 최근 배우 이재룡의 음주운전 사고는 술방의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재룡은 지난달 6일 밤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달아났다 적발됐다. 이른바 술타기(음주운전 사고 후 술을 마셔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을 방해하는 수법) 수법까지 동원해 음주측정 방해 혐의도 추가됐다. 음주운전 사고로 인한 면허취소(2003), 음주로 인한 재물 손괴(2019)에 이어 음주로 인한 물의만 세번째다.
활동이 뜸했던 그의 사고가 유독 공분을 산 이유는 사고 한 달 전 출연한 짠한형 때문이다. 영상 제목엔 ‘원샷→만취’라는 문구가 걸렸고, 제작진은 ‘찐친들이 인정하는 주당’이라는 자막을 달았다. 심지어 동석해 “이재룡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추켜세운 안재욱은 음주운전 재범 전력이 있었다. 주량을 자랑하던 이재룡은 한 달 만에 경찰 포토라인에 섰다. 쏟아지는 비판에 해당 영상은 비공개 처리됐지만 주당 이미지를 부각한 제작진의 입장 발표는 없었다.
주량을 자랑하던 이재룡은 한 달만에 경찰서 앞 포토라인에 섰다. 폭주하는 비판에 이재룡 출연 영상은 슬그머니 비공개 처리 됐다. ‘주당 이재룡’ 이미지를 강조한 제작진의 입장 발표는 없었다. 앞서 음주운전 전과나 구설이 있었던 이정재, 탁재훈, 이이경, 심현섭 등을 섭외해 술잔을 들게 한 제작진은 물론 많고 많은 예능 중에 ‘술방’을 택한 출연진을 향한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비단 짠한형 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디어 매체를 통틀어 음주 장면은 빈도는 점차 상승하고 있다. 실제로 유튜브 조회수 상위 100개 음주 콘텐츠를 보면 모든 영상에 문제 음주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관계부처의 미디어 음주장면 가이드라인, 경고문구 등의 추가도 큰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 OTT나 유튜브 등 강제성 없는 법적 사각지대의 매체들은 상황이 더욱 심각한 현실이다.
◆가이드라인은 있다, 강제할 방법이 없다
현행법상 OTT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른 자체 등급 분류를 거치고, 유튜브는 정보통신망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두 플랫폼 모두 음주 장면 묘사에 관한 강제 규정은 전무하다. 규제 공백을 틈타유튜브 내 음주 관련 조회수 상위 100위권 콘텐츠 중 유명 연예인이 등장하는 비율은 2021년 10%에서 2024년 42%로 약 4.2배 급증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미디어 속 음주 장면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높이고자,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한 광고 ‘이제 깨어나자! 미디어 술스라이팅’을 발표하고 인식 개선에 돌입했다. 음주를 일상 속의 당연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권하는 미디어 환경 술스라이팅(술+가스라이팅) 위험성을 강조하고, 국민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방안이다.
제도적 보완도 뒤따랐다. 2023년 개정된 ‘절주 문화 확산을 위한 미디어 음주 장면 가이드라인’에는 기존의 ▲음주 장면 최소화 ▲폭음·만취 등 해로운 음주 행동 묘사 삼가 ▲음주 장면이 주류 제품 광고 수단이 되어서는 안됨 등의 조항에 더해 ▲음주행위 과도한 부각과 미화 장면에 대한 유해성 경고 문구 삽입 ▲연령 제한을 통한 청소년 접근성 최소화 등의 조항이 신설됐다.
그러나 강제성 없는 권고 수준에 그치다 보니 시정 조치는 미미하다. 이제는 미화된 음주 문화에 대한 도덕적 경각심을 넘어, 무분별한 콘텐츠 범람을 막을 실효성 있는 개선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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