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무대 위 한지상을 마주할 때면 매번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데뷔 이후 수많은 시간을 무대 위에서 보냈음에도, 정체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캐릭터 해석과 깊어진 표현으로 객석을 휘어잡는다. 최근 뮤지컬 ‘에비타’의 체와 ‘쉐도우’의 영조라는 극과 극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며 전성기를 갱신 중인 그를 만났다. 현재의 한지상은 과거보다 더 뜨겁게 연습하고, 단련하며 무대라는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비타’의 체(Che)…이성과 열정 사이의 냉철한 관찰자
Q. 체는 극 중 유일하게 에바 페론을 비판하는 인물입니다. 나레이터이자 반대자라는 이중적 위치를 어떻게 해석했나요?
“저는 체 게바라를 더 직접적인 모티프로 설정하고 접근했습니다. 실제 역사 속 두 인물이 만나 설전을 벌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가장 흥미로웠죠. 체는 이성적인 혁명의 아이콘이고, 에바는 감성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사상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대척점에 있어요. 저는 체가 가진 '혁명 지상주의'를 보여주기 위해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며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30대에 요절한 그의 치열한 삶을 담아내기 위해 수염과 뒷머리를 기르는 외형적인 공도 들였죠. 관객들에게 '이 사람은 혁명가다'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Q. 극 중 에바와 대립하며 경계를 오가는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가장 신경 쓴 지점은 무엇인가요?
“마치 ‘쇼미더머니’ 같은 배틀이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사상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내 논리가 상대를 이길 것 같은 기세가 만들어질 때 쾌감이 느껴지거든요. 저는 공연장에 천 분이 계시든 이천 분이 계시든, 관객 한 분 한 분을 위해 공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에게 ‘지금 저 에바라는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기자의 마음으로 무대에 섭니다.”
Q. 넘버 ‘Oh What a Circus’ 등에서 느껴지는 냉소적인 목소리는 어떻게 완성했나요? 딕션이 더 좋아졌습니다.
“비판가이자 혁명가의 말은 명확해야 합니다. 40대가 된 지금, 저는 30대보다 더 열심히 연습합니다. 발성, 딕션, 화술, 몸의 움직임까지 모든 건 결국 근육이 기억해야 하거든요. 예전엔 젊은 회복력을 믿고 ‘까불었다면’, 이제는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는 맛에 연습합니다. ‘살기 위한 싸움’ 같은 간절함이 목소리에 투영된 것 같습니다."
Q. 막공 때 직접 수염을 지우는 퍼포먼스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클렌징 티슈로 캐릭터로서 유의미했던 콧수염을 지우며 정들었던 체를 떠나보냈습니다. 가사 중에 ‘대성공이야, 엄청난 선택이었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저에게 체를 맡게 된 것이 딱 그랬습니다. 대성공이었고, 행복한 선택이었죠.”
◆‘쉐도우’의 영조…권력의 정점에서 마주한 인간적 슬픔
Q.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영조를 연기하며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영조를 단순히 무섭고 괴팍한 왕으로만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뒤주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면의 아픔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죠. 마치 영화 ‘나홀로 집에’의 무서운 할아버지가 후반부에 알고 보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반전을 주는 것처럼요. 영조와 사도가 부자가 아닌 친구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 시대가 낳은 비극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Q. 20대부터 노년까지의 시간 변화를 어떻게 표현했나요? 시간대별로 8가지 버전의 영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연출진과의 협업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20대와 연출님이 생각하는 성숙도가 다를 때, 제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죠. 영조에게도 순애보가 있고, 매력적인 남자의 모습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걸음걸이와 표정 하나하나에 메소드를 녹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Q. 특히 락(Rock)적인 발성이 돋보이는데, 영조의 감정과 어떻게 연결했나요?
“락은 저항과 자유를 향해 뻗어 나가는 철성(鐵聲)의 에너지입니다. 포용하는 발라드와 달리 직진하는 힘이 있죠. 영조가 자신을 죽이라며 칼을 내미는 장면에서 그 에너지가 폭발합니다. ‘내 안엔 이제 탄 재밖에 남지 않았다’는 허망함을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담았습니다.”
◆한지상이 말하는 ‘믿음의 운동’
Q.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 한지상으로서 최근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최근 수 년간 ‘믿음의 운동’이라는 걸 해왔습니다(웃음). 불안과 의심이 올 때마다 꿋꿋하게 하루 0.1%씩 믿음을 쌓아가는 거죠. 예전에는 야망을 쫓았다면 이제는 행복과 건강, 그리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제 삶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저를 지켜주시는 존재들에게 겸손을 배웠고, 그 희망이 저를 다시 무대에 세웁니다.”
팬들에 대한 감사함도 전했다. 그동안 일부 악플러로 인한 피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곁을 지켜준 팬들이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최근 한지상에 대해 악의적인 선동과 허위 사실을 퍼뜨린 악플러는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올해 검찰에서 기소 처분을 받았다.
한지상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태워 재만 남기는 배우다. 그러나 그 재 속에서 그는 매번 더 단단한 믿음의 근육을 키워내며 부활한다. ‘에비타’와 ‘쉐도우’를 통해 보여준 그의 압도적인 장악력은 결코 우연이 아닌, 0.1%의 믿음을 매일같이 단련해 온 수행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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