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희의 눈] 웃자고 한 말, 웃지 못하는 사람들…달라진 웃음의 무게

요즘 웃음이 자주 사고를 낸다. 웃기려고 던진 말이 논란이 되고, 농담이라며 넘기자던 장면이 다음 날 기사 제목이 된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도 그랬다. 말한 쪽은 웃자고 한 이야기였을 것이고 현장에서도 웃음은 났다. 하지만 방송이 나간 뒤 웃지 못한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이 발언에는 깊은 악의도, 진지한 토론도 없었다. 웃음을 만들기 위해 다른 종목을 낮춰 부르는 방식이 선택됐을 뿐이다. 그런데 그 ‘그냥 한 말’이 생각보다 멀리 갔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직접 뛰어본 사람들, 주말마다 구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농담이 아니라 자기 취향과 시간을 통째로 깎아내린 문장처럼 들렸다.

 

웃음은 참 묘하다. 말한 사람은 지나가지만, 듣는 사람은 오래 붙잡힌다. 웃자고 던진 말은 쉽게 사라지는데, 그 말을 들으며 생긴 감정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웃음은 늘 비대칭이다. 한쪽은 가볍고 다른 쪽은 설명해야 한다.

 

논란이 생기면 늘 비슷한 말이 따라온다. “예능인데 그 정도는 웃고 넘겨야지”, “왜 이렇게 다들 예민해졌냐”라는 이야기다. 이 말의 문제는 웃음의 책임을 전부 불편해한 사람에게 넘긴다는 데 있다. 웃긴 쪽은 자유롭고 불편한 쪽은 까다로운 사람이 된다.

 

풍자와 비하는 방향에서 갈린다. 풍자는 위를 향한다. 힘 있는 구조, 강한 쪽을 비틀어 웃음을 만든다. 그래서 불편해도 의미가 남는다. 반면 비하는 옆이나 아래를 향한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낮춰 상대적인 우위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이 불편했던 이유는 웃음의 방향이 종목과 그 팬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농담이 특히 위험해지는 공간이 방송이다. 사석이었다면 흘러갈 말도, 마이크를 타고 편집을 거치면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메시지는 의도와 다르게 읽힌다. 말한 사람은 웃자고 했지만 화면 밖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 간극을 고려하지 않은 웃음은 결국 사고가 된다.

 

흥미로운 건, 이런 경우 대부분 사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사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웃자고 한 말 하나가 고개를 숙이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은 요즘 웃음이 얼마나 얇은 얼음 위에 올라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예민해진 걸까 아니면 웃음이 거칠어졌을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웃음의 속도는 빨라졌고 생각의 여유는 줄었다. 더 세게 말할수록 반응이 오고, 더 잔인할수록 웃음이 빨리 터진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낮추는 방식은 너무 쉽게 선택된다.

 

그렇다고 웃음을 포기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질문 하나는 남아야 한다. 이 웃음은 누구를 웃기고, 누구를 가만히 만들고 있는가. 현장에서 웃던 사람들 말고, 화면 밖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가. 그 장면까지 상상하지 못한 웃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요즘 비하 논란의 대부분은 거대한 악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분위기를 띄우려던 말, 한 번 더 웃기고 싶었던 욕심, 그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그 말이 지나간 자리에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자기 감정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만 남는다는 점이다.

 

웃음은 가장 개인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가장 공적인 언어다. 특히 많은 사람이 동시에 듣는 공간이라면 더 그렇다. 함께 웃게 만드는 농담과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농담의 차이는 생각보다 분명하다. 웃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지면 풍자고, 웃고 나서 괜히 입을 다물게 되면 비하다.

 

요즘 웃음이 자주 논란이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웃음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웃음이 닿는 방향에 대해 예전보다 집중하기 때문이다. 웃자고 했다는 말로 모든 것이 정리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웃음도 말한 만큼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예능이 시사 프로그램보다 어려운 시대로 들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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