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어둠 속 한 줄기 빛이다.
‘가이드 러너.’ 시각장애인 육상선수의 파트너를 의미한다. 테더로 연결해 끈을 당기고 풀며 길을 안내하고 안전을 확보한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육상 종목에선 필수다. 선수는 단 하나의 끈, 오로지 가이드 러너만을 믿고 과감하게 발을 구른다. 끈끈한 신뢰로 이어진 관계, 그 속에서 선수는 한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국내 최고의 시각장애 육상선수 김초롱과 그의 가이드 러너 정수효의 이야기다.
김초롱은 앞을 보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전맹)이다. 약 5년 전 선천적으로 앓았던 각막 혼탁 증세가 심해지며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전에 잠시 했었던 시각장애인 스포츠 ‘골볼’에 다시 도전했지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지인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했다. 역시 쉽지 않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던 도중 은인이 나타났다. 주인공은 100m를 10.82초 만에 주파하는 육상선수 출신 가이드 러너 정수효다.
찰떡궁합, 한국 신기록에 이름을 아로새긴다. 처음부터 잘 맞았다. 둘은 만난 지 2개월 만에 전국장애인육상선수권대회 100m, 400m서 한국 신기록을 작성했다. 4개월 뒤엔 전국장애인체육대회서 또 한 번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며 3관왕(100m, 200m, 400m)에 오르기도 했다. 올해 시각장애인 선수-가이드 러너 국가대표로도 발탁됐다. 지난 11월 장애인체전에선 4관왕(100m, 200m, 400m, 400m릴레이)과 함께 우수파트너상까지 수상했다.
◆함께한 시간
돌고 돌아 꿈을 이뤘다. 정수효는 고등학교 시절 트랙 위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육상 유망주였다. 부상과 각종 이슈가 겹치며 대학 진학을 앞두고 그만둬야 했지만 트랙 위에 두고 온 미련까지 지울 순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다시 달리기 시작한 시점, 지인의 권유로 김초롱의 가이드 러너가 됐다. 다시 트랙을 달릴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선수 시절 막연하게 꿈꿨던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정수효는 “사실 육상에 미련이 정말 많았다”라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운 좋게 (김)초롱 선수를 만나 다시 트랙을 달리게 됐다. 못다 한 꿈까지 이뤘다. 모든 선수의 꿈은 국가대표가 아닌가. 나 역시 그랬다. 평생 꿈으로 남겨둬야 할 상황이었는데, 초롱 선수를 만나서 미련은 지우고 꿈은 이루는,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미소 지었다.
김초롱이 대회에서 수상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얘기가 있다. “정수효 가이드 러너에게 고맙다”는 말이다. 정수효는 오히려 본인이 더 고맙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는 “선수 시절 내 최고 기록은 100m 10.92초였다. 초롱 선수를 만나고 생활체육 대회를 혼자 나갔는데, 선수 때 기록을 깨고 10.82초를 뛰었다”며 “선수를 그만둔 지 8년이 됐는데, 이런 페이스를 낼 수 있는 게 신기하지 않나. 초롱 선수를 만나서 함께 뛰니 선수 때보다 몸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웃었다.
◆함께할 시간
날씨가 유독 좋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김초롱과 함께 훈련하던 정수효는 “날씨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김초롱은 “그래? 나는 안 보여서 모르겠네”라고 농담했다. 정수효는 흠칫하면서도 따라 웃었다. 그러곤 다짐했다. 더 좋은 눈이 돼주겠다고.
‘올림픽은 영웅이 탄생하지만, 패럴림픽은 영웅이 출전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어려운 도전이다. 함께라면 포기는 없다. 김초롱-정수효의 시선은 내년 일본에서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으로 향한다. 전맹 시각장애인 한국 최초 메달을 노린다. 그다음 플랜도 벌써 짜놨다. 2028년 LA 패럴림픽이다. 김초롱은 “인생에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올해 초 목표를 잡았을 때만 하더라도 막막한 느낌이었지만, 이루고 나니 다음 목표를 세우고 싶더라. 내년에도 같이 달려줄 정수효 가이드 러너에게 감사한 마음”이라며 “2028년 패럴림픽도 꼭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수효는 “지금도 매일 훈련하고 있다”며 “초롱 선수는 정말 긍정적인 친구다. 고맙게도 ‘함께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주 말한다. 그럴 수 있도록 좋은 파트너로서 나도 열심히 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의 아름다운 여정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뽑자면 시스템이다. 가이드 러너는 시각장애인 선수에게 꼭 필요한 존재지만, 이제껏 대회 직전 단기적으로 호흡을 맞추는 게 다반사였다. 사실상 정수효가 한국 최초의 전문 가이드 러너인 셈이다.
정수효는 “가이드 러너라는 직업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보니 시각장애인 선수가 가이드 러너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며 “시각장애인 육상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이드 러너에 대한 지원 체계가 확실해져야 한다. 또 선수에 비하면 처우가 좋지 않다 보니 장기적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똑같이 함께 달리는 선수로서 좋은 처우를 받는 날이 왔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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