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미식] 김치, 곁들임 넘어서 미식 메인으로

2025 한식 컨퍼런스 워크숍 개최
김치, 현대적 미식 언어로 재해석
반찬 아닌 하나의 요리 장르 제시

세계 셰프 20명과 발효미학 공유
물김치·순무 등 계절별 김치부터
갈치김치 등 전통 복원 김치까지
김치냉장고 시스템도 깊은 인상

“어떻게 보여주고 경험하게 할지
전통 한식 글로벌화의 다음 과제”
권우중 셰프가 갓 버무린 제피 파김치를 워크숍에 참석한 셰프에게 건네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막 무친 제피 파김치입니다. 혹시 한입 드셔보고 싶으신 분?”

 

권우중 권숙수 오너셰프가 갓 버무린 제피 파김치를 식탁 위에 올리며 묻자 외국인 셰프가 서슴없이 한입 받아먹는다. 마치 김장 현장을 방불케 하는 순간이다. 평가는 ‘엄지 척’.

 

‘두유 노 김치?(do you know 김치)’라는 주입식 질문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이제 세계는 ‘김치는 한국의 전통 발효음식’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안다’와 ‘어떻게 요리로 즐길 것인가’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남아 있다. 김치를 한국 전통음식으로 인지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이를 미식 경험으로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한식 글로벌화의 다음 과제다.

 

이와 관련 한식진흥원은 미쉐린 2스타를 받은 한식당 권숙수에서 ‘2025 한식 컨퍼런스 워크숍’을 열고 김치의 전통을 현대 문법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공유했다. 강연과 시연은 권우중 셰프가 맡았다. 권 셰프의 강연 주제는 ‘한국의 채소발효: 포용성 - 채소발효의 현대적 해석’이었다. 그의 시그니처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김치를 한데 모은 ‘김치 카트’다.

권숙수의 시그니처 김치 카트. 사진=정희원 기자
다양한 김치를 한 접시에 구성한 김치 카트 플레이팅. 계절·재료·조리 방식이 다른 김치들이 한 접시에 정갈하게 담겼다. 사진=정희원 기자

워크숍에는 스페인의 세계적인 레스토랑 엘 불리의 스타 셰프 페란 아드리아, 포르투갈의 미슐랭 2스타 셰프 호세 아빌레즈, 토니 마사네스 세계 요리과학연구소 알리시아 연구소장, 태국의 첫 번째 미슐랭 3스타 셰프 수팍손 아이스 종시리, 인도의 떠오르는 스타 셰프 베룬 토틀라니, 뉴욕의 유명한 한식 레스토랑 아토믹스의 박정현 셰프 등 국내외 미식 거장 20여명이 참석했다.

김치도 요리가 될 수 있다. 권우중 권숙수 오너셰프는 김치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양한 요리로 제시해 설명했다. 사진=정희원 기자

◆김치, ‘안다’에서 ‘즐긴다’로

김치가 서양에서 식탁으로 바로 연결되기 어려운 이유는 주식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권 셰프는 “김치는 밥과 함께 먹기 위해 만들어진 채소 발효 음식”이라고 설명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계절을 넘기기 위해 절임·발효·젓갈·양념을 통해 맛을 고도화해온 것이다. 반면 서양 등 빵을 주식으로 삼는 식탁에서는 김치가 바로 어울리기 어렵다.

그래서 권 셰프는 김치를 ‘반찬’이 아닌 하나의 ‘요리’로 보여주는 방식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권숙수가 누구나 아는 배추김치 대신, 덜 알려졌지만 계절성과 지역성이 선명한 김치들을 선보이는 이유다. 권 셰프는 “같은 이름의 김치라도 계절·지역의 언어가 다르다. 요리는 그 차이를 식탁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봄에는 풋마늘잎·쑥·돈나물 등 향이 강하고 신선한 봄나물을 이용한다. 여름에는 소박이류와 물김치류가 중심이 된다. 고추 속을 채운 소박이, 오이·고추 물김치, 그리고 여름 감자를 으깨 전분감을 살린 감자 김치, 깻잎 물김치, 고구마순 김치 등이다.

가을에는 우엉·더덕·유자·전어 등 수확기 뿌리채소와 제철 생선을 활용한다. 특히 전어를 썰어 넣은 김치와 고들빼기 김치는 가을 특유의 향과 감칠맛을 살린 대표 메뉴다.

겨울에는 굴 깍두기, 홍시 김치, 순무 김치 등 저장성과 계절성을 살린 김치를 담근다. 강화도 지역에서 전승된 순무김치처럼 한국인조차 맛볼 기회가 적은 김치를 다시 재현해 소개하는 방식이다.

◆사라져가는 김치, 다시 식탁으로

워크숍 종료 후 권우중 셰프와 참석자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셰프들이 한식 발효 문화를 공유하는 자리가 됐다. 사진=정희원 기자

권 셰프는 이러한 작업을 “사라져가는 김치의 복원”이라고 설명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는 이가 줄어들면서 지역과 전통 김치가 점점 소멸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조차 맛보지 못한 김치가 많다. 그 전통을 다시 식탁 위로 올리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지역별 재료와 전통 조리서를 함께 연구한다. 전라남도의 갈치 김치, 제주도의 자리돔 김치, 이북 지역에서 내려오는 양지·돼지고기를 넣은 김치 등 지역 특산 김치가 대표적이다. 이뿐 아니라 고문헌 속에 기록만 남고 실제로는 사라진 김치 레시피를 발굴해 되살리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꿩김치가 여기에 속한다. 꿩 육수로 담가 삶은 꿩고기와 함께 개운하게 먹는 김치다.

겹김치. 사진=정희원 기

전통을 기반으로 창작을 더한 김치도 개발했다. ▲백김치에 양지·전복·낙지·새우를 말아 맛의 결을 깊게 만든 권숙수의 대표 ‘겹김치’ ▲과일 향을 은은하게 입혀 산미와 단맛의 균형을 맞춘 ‘바나나향 백김치’ ▲호박의 단맛과 전분감으로 부드러운 풍미를 낸 ‘늙은호박 김치’ ▲산초(제피) 특유의 알싸한 향을 파김치에 더한 ‘제피 파김치’ 등이다.

권 셰프는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한 뒤 발효한다는 김치의 기본 원리는 그대로 두되 재료·향·조합을 바꾸면 전혀 새로운 김치가 된다”며 “전통 김치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새로운 김치의 미래를 함께 열고자 한다”고 말했다.

권우중 오너셰프가 제피 파김치를 무치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김치를 ‘요리’로 만드는 시스템

권숙수가 김치를 만드는 방식은 ‘요리로서의 김치’에 맞춰 표준화돼 있다. 주요 양념은 농가와 계약 재배를 통해 연 단위로 동일한 품질을 확보한다. 김치를 전담하는 조리 인력은 최소 3년 이상의 경력자다. 납품된 재료의 편차가 크면 권 셰프가 주 1회 시장에 직접 나가 선별한다. 그는 “김치를 담그는 사람이 바뀌면 결과가 달라진다”며 “일관성 확보가 김치를 요리처럼 다루는 전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권우중 셰프는 현장에서 제피 파김치를 담갔다. 제피가루를 넣어 일반 파김치보다 향긋하다. 그에 따르면 깍두기와 함께 가장 담그기 쉬운 김치라고. 파의 향을 전면에 두기 위해 마늘·생강은 쓰지 않았다. 단맛은 사과와 매실엑기스로 맞추고 두 종류의 액젓과 멸치로 감칠맛을 구성했다. 전분 재료는 배제했다.

토니 마사네스 세계 요리과학연구소 알리시아 연구소장이 제피 파김치 양념을 덜어 맛보고 있다.사진=정희원 기자

분자 요리의 거장 엘란 아드리아 셰프는 ‘양념을 먹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이를 토니 마사네스 세계 요리과학연구소 알리시아 연구소장과 맛본 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거장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김치 발효를 뒷받침하는 설비였다. 권 셰프는 “한국 가정에는 김치를 위한 전용 냉장고가 있다”고 말하자 해외 셰프들이 호응했다. 곧바로 주방으로 이동해 김치 냉장고를 직접 확인했다. 김치냉장고는 온도를 0.5도 단위로 조절하며 발효 단계별 실제 보관 위치를 나눌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김치의 균질성이 조리 기술만이 아니라 저장·관리 체계에서 나온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셰프들이 권숙수 주방으로 이동해 김치 냉장고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권 셰프는 “김치는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식”이라며 “앞으로의 과제는 김치를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경험하게 하며, 어떻게 일관된 품질로 재현하느냐”라고 말했다.

계절과 지역, 사용하는 재료와 식재료 관리, 서빙 방식, 그리고 보관 기술이 함께 작동할 때 김치는 하나의 요리 장르가 된다. 한식 발효 문화가 세계 미식 무대에서 힘을 얻으려면 전통을 지키면서도 맛의 기준과 조리 과정을 안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권숙수에서 김치는 밥상 한쪽에 놓여 곁들이는 반찬이 아니라 코스 속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메뉴였다. 실제로 김치카트를 6번이나 리필해 먹은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정희원 기자 happy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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