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談談한 만남] 생존 기로 선 태권도 “새 세대 손잡자”…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의 시선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이 “태권도는 닫힌 문을 열고 나아가야 한다”며 변화의 기수로 앞장서는 중이다. 사진=김용학 기자

 

전국을 밝히던 태권도장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도복을 입고 놀이터와 거리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도 이제는 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끊어진 생활체육의 맥, 태권도도 피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구 감소와 사교육 전쟁은 청소년 스포츠의 근간까지 흔들고 있다. 엘리트 태권도의 국제 경쟁력 또한 예전과 같지 않다.

 

새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생존과 혁신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흐름을 읽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외치며 태권도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만났다.

 

양 회장은 2021년 제29대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 당선된 뒤 지난해 12월 연임에 성공한 바 있다. 용인대 교수 출신으로 세계태권도연맹(WT) 집행위원과 아시아태권도연맹 부회장, 대한체육회 감사로도 활동하는 등 학자이자 행정가로서의 폭넓은 경험을 지녔다.

 

“태권도는 이제 생존의 문제에 맞닿아 있다. 큰 위기를 맞았다”며 “도장들이 문을 닫고, 선수 숫자도 급감하고 있다. 생태계의 문제”라는 것이 양 회장의 진단이다. 이어 “협회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만 그치면 안 된다.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은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며 “앞으로 4~5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 사진=김용학 기자

 

◆키 작은 소년 사로잡은 ‘태권도’, 평생의 길로

양 회장과 태권도의 첫 만남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는 “어린 시절 태권도는 그 또래 모든 친구들의 로망이었다”며 웃은 뒤 “왜소한 체격으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열정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영남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태권도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넓은 시야를 갖추게 되며 애정이 더욱 깊어졌다는 설명이다.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양 회장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태권도의 새로운 모습이 있었다. 그게 바로 ‘경기 태권도’였다”고 말했다. 이른바 태권도의 ‘시합화’, ‘스포츠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는 “이미 국가대표 선수들이 있었고 세계선수권대회도 열리고 있었지만, 기존 태권도계는 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여전히 전통 태권도 중심의 사고에 머물러 있었고, 경기 태권도를 도리어 ‘이상한 것’, 나아가 ‘변질됐다’고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피 끓는 청춘이었던 양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내 눈에는 무술사적으로 엄청난 진전, 즉 기술의 혁명처럼 보였다”고 돌아봤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이 한국 태권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용학 기자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태권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탐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 전공까지 바꿨다. “태권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더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했고,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대학원을 서울대 체육교육학과로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1986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낸 ‘해방 이후 한국 태권도의 발전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 : 경기태권을 중심으로’는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정도다. 학자로서도 자부심이 깊은 대목이다. 양 회장은 “그 논문이 이후 20~30년간 태권도 인문학의 주요 화두가 됐다. 계속해서 반박은 물론이고, 해설 논문이 파생돼 나올 만큼 큰 관심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이윽고 시선은 세계로 향했다. 양 회장은 “태권도의 가치는 국제적으로 더 빛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기원에서 일하던 중 해외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태권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 사진=김용학 기자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WT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잠시 학업을 접고 지도자로 변신한 배경이다. 이어 중국태권도협회 설립과 WT 가입을 도왔고, 중국 대표팀의 첫 출발이었던 1995년 마닐라 세계선수권대회를 코치로서 함께했다.

 

이후 귀국해 용인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2003년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로 선임되며 20년 넘게 행정 일선에 몸담았다. “예상치 못한 인연이었지만 잘 맞았다”고 미소 짓는다. 더불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큼, 행정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는 ‘공정’이다. “협회를 운영하는 사람은 골키퍼와 같다”며 “들어와선 안 되는 골을 막아내야 한다. 이 신념은 태권도협회뿐만 아니라, 모든 수장에게 해당하는 얘기 아닐까. 부정한 청탁, 불공정한 인사나 예산 집행 같은 걸 끝까지 걸러내야 한다. 공정이 확보돼야 태권도인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이 종목에 몸담는 의미가 생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이 한국 태권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용학 기자

 

◆“태권도, 더욱 친근하고 매력적인 스포츠로!”

코로나19는 태권도계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양 회장은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절벽까지 닥치면서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졌다”며 “이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라고 말했다. 또한 “전국 1만여개 도장 중 상당수가 문을 닫았고, 유지하는 곳조차 규모가 크게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수층 역시 빠르게 얇아지고 있다. 양 회장은 이 같은 위기가 정체된 의식을 거쳐 악화됐다고 본다. “지금 청소년들이 다 떠나면 어쩔 거냐”며 “태권도가 옛날 것을 고집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인 건 태권도계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태권도를 문화로, 또 산업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단순 무술’이라는 인식부터 바꾸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정책도 통하지 않는다. 다양한 방식을 포용하며 발전할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폐쇄성을 벗어던져야, 태권도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양 회장의 외침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포함돼 있다. 변화해야 하며, 새로운 세대를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시대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지난 10일 대한태권도협회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태키타카 10화. 태권도 선수 김향기와 서은수, 이가은(왼쪽부터)이 출연했다. 사진=대한태권도협회 유튜브
지난 3일 대한태권도협회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태키타카 9화. 태권도 선수 김향기와 서은수, 이가은(왼쪽부터)의 모습. 사진=대한태권도협회 유튜브

 

양 회장은 “지금 세상은 이미 SNS와 유튜브의 시대”라며 “이건 위기이자 기회다. 방송 중계가 사라진 비(非)메이저 종목들에겐 오히려 스스로 존재감을 보여줄 무대가 열린 셈”이라고 강조했다. 협회 내 SNS 담당 및 디지털 소통팀을 신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양 회장은 “SNS는 단순 홍보를 넘어선 문화 확장의 통로”라며 “젊은 세대가 소비하는 방식과 속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태권도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로 협회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체 제작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그중 MZ세대의 감각을 반영한 ‘태키타카’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태권도 선수들의 경기장 밖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적인 매력과 솔직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토크쇼다. 

 

태권도를 더욱 친근하고 매력적인 스포츠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계속된다. 양 회장은 “예전엔 6~8세 어린이들이 도장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청소년과 고학년, 심지어 성인까지 확장돼야 한다”며 “소규모 스포츠클럽형 도장,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이 새로운 생존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태권도는 ‘쿨한’ 스포츠로 자리 잡아야 한다. 춤과 무용, 아크로바틱이 결합된 시범단이 전세계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 않나. 젊은 세대는 이미 태권도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했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이 한국 태권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용학 기자

 

이 같은 철학은 버추얼 태권도 활성화로 이어지고 있다. e스포츠·메타버스 흐름 속 태권도의 입지도 커지는 시점이다. “버추얼 태권도는 게임적인 가능성이 많이 부각되고 있지만, 다른 부분 역시 주목하고 싶다. 바로 공간과 신체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이라는 게 양 회장의 시선이다.

 

이를 두고 “유럽과 미국, 케냐 등지의 수련생이 한국 도장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종주국인 한국이 이런 혁신의 흐름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기술과 문화가 결합될 때 태권도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훨씬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엘리트 태권도도 놓칠 수 없다. 스타 탄생이 저변 확대로 이어지는 케이스를 만들어야 한다. 양 회장은 “이대훈 동아대 교수가 은퇴 후에도 여전히 태권도의 얼굴이다. ‘포스트 이대훈’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수 육성은 물론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장기적으로 스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협회가 할 일이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선수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환경과 상업적 기반, 즉 ‘커머셜 베이스’를 만들어주는 게 가장 큰 숙제”라고 힘줘 말했다.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장. 사진=김용학 기자


김종원 기자 johncorners@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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