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韓스포츠②] 경성운동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韓 체육계 희로애락을 묻은 82년의 자취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입구에 자리한 동대문운동장 간판. 실제로 철거 당시 운동장에 걸려있던 간판이 그대로 옮겨왔다. 일부 완벽하지 않은 글자들은 서울시가 보수해 기념관을 채웠다. 사진=스포츠월드 허행운 기자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내려앉는다. 세계적인 건축가의 손에서 피어난 수려한 곡면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의 셔터음이 쏟아진다. 그 틈새에 소박히 자리한 한 전시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월이 담긴 ‘동대문운동장’ 간판이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의 시작을 알린다.

 

넓지 않지만, 세월의 밀도로 가득찬 느낌을 준다. 1925년 지어져 2007년 철거되기까지 동대문운동장이 품었던 82년을 응축시켰다. 경성운동장에서 서울운동장 그리고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의 변화가 곧 시대의 변화였다. 일제강점기의 아픔, 해방의 환희, 근현대 한국의 발전이 각자의 시간 속 서로 다른 표정에 오롯이 묻어난다. 세 시대를 잇는 하나의 길,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이 존재하는 이유다.

 

◆식민의 상징, 경성운동장

 

1955년 동대문운동장(당시 서울운동장) 일대 전경.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25년, 일제는 당시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해 대규모 운동장을 건설했다. 조선 군사시설인 하도감과 염초청이 위치한 바로 이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건축물로 뒤덮었다. ‘경성운동장’의 시작에는 조선의 얼굴을 지우려는 일제의 악의가 담겼다. 당시 동양 최대 운동장인 일본 고시엔에 버금가는 규모, 총면적 7만5000㎡와 수용인원 2만5900명 등의 숫자에는 그들의 과시욕도 포함됐다.

 

개장과 함께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는 일본 정·재계 고위층으로 꾸려진 조선체육협회에서 주최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여가가 아닌 일제의 선전으로 이용된 스포츠의 어두운 얼굴을 확인하던 곳이었다.

 

그 와중에도 한국 체육의 별들은 독야청청 빛을 뿜었다. 1930년대 복싱의 신으로 불린 서정권이 바로 그곳에서 화끈한 스파링으로 조선의 설움을 깨부쉈다.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으로 나아가기 전에 조선신궁경기대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 등 국내 마라톤 무대를 휩쓸던 곳도 바로 여기다. 그들의 얼과 땀이 그대로 기념관의 사진들에 서려있다.

 

민족의 아픔과 슬픔이 머물던 자리이기도 하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황제 국장이 치러진 장소도 이곳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는 강제로 징병된 조선 청년들의 군사훈련, ‘황국신민체조’ 등의 규율화된 운동만이 허락된 공간이었다.

 

◆우리의 품으로, 서울운동장

 

1982년 서울시민체육대회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동대문운동장(당시 서울운동장)의 전경.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45년 광복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새 이름 ‘서울운동장’으로 뜨겁게 숨 쉬었다. 전시관의 조명도 한결 밝아지는 느낌,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에도 활기가 되살아난다. 1945년 10월 열린 자유해방경축전국종합경기대회에서야 드디어 이곳에서 태극기가 펄럭였다. 상하이·충칭에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식도 열리는 등 해방의 기쁨이 한 데 어우러진 장소로 변모했다.

 

분단의 아픔도 함께 담겼다. 신탁통치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 좌익과 우익의 규탄 집회가 서울운동장을 일종의 전장으로 만들었다.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던 김구, 좌우합작운동에 나섰던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에서 울려퍼진 통곡도 고스란히 기념관에 남아있다.

 

분단 이후로는 근현대 한국 사회의 발전, 그리고 체육계의 굵직한 역사를 공유하는 장소로 거듭났다. 여자 선수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가 이곳에서 무거운 포환을 던져대며 한국신기록을 숱하게 갈아치웠다.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갈색 폭격기’ 차범근의 주무대도 이곳이었다. 1973년 뮌헨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전 연장 결승골, 1976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종료 직전 7분간 몰아친 해트트릭 등의 명장면을 바로 탄생시키며 국민들의 자부심 그 자체가 됐다.

 

한국 야구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운동장 야구장도 빼놓을 수 없다. 고교야구가 구가한 선풍적인 인기 속에서 최동원·선동열 등 굵직한 스타의 요람으로 자리했다. 1975년 당시 경남고 2학년이었던 최동원이 전국우수고교초청경기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을 써내던 순간, 197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20탈삼진 완봉승을 물들이던 순간이 기념관에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당연히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개막전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기념관에 남아있는 알록달록 색칠된 당시 야구장 관중석 의자, 한국 최초의 야간경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조명과 조명탑에는 당시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굿바이, 동대문운동장

 

1985년, 마지막 이름 ‘동대문운동장’이 찾아왔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해 잠실에 새롭게 올라온 운동장의 명칭이 ‘서울종합운동장’으로 확정된 여파였다. 여전히 프로축구, 고교야구 경기가 펼쳐지긴 했지만, 위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자연스럽게 화려한 영광을 등 뒤에 둔 내리막길이 찾아왔다. 80년이 넘는 역사를 함께하며 피하지 못한 노후화, 새로운 공간을 찾는 서울의 목소리에 결국 2007년 12월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제3장을 연 기념관의 길의 조명도 함께 옅어진 이유였다.

 

기념관에는 82년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순간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마지막 축구 경기는 2000년 10월 22일 수원 삼성과 성남 일화의 2000 아디다스컵 결승전이었다. 수원의 서정원이 뽑아낸 결승골이 축구장의 피날레를 알린 골로 남았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2007년 11월 13일 열린 배명고와 충암고의 추계 서울특별시 고교야구 대회 결승전이었다. 고교야구의 성지라는 애칭에 걸맞게 작별의 순간에도 야구 꿈나무들의 열정이 마침표를 찍었다. 경기 후 펼쳐진 고별행진에 나선 야구 원로들은 지나간 세월을 동대문운동장에 묻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포개어진 3개의 시대, 그리고 지금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남아있는 동대문운동장의 성화대. 사진=스포츠월드 허행운 기자

 

이제 동대문운동장은 우리의 기억, 그리고 바로 이 기념관에 남은 사진과 영상으로만 남았다. 여기에 당시의 숨결이 남아있는 성화대와 조명탑 2개가 역사공원 내에 숨쉴 뿐이다. 

 

82년을 따라 걷는 동안, 함께 기념관을 살피며 설명을 더해주던 관계자도 덩달아 추억에 젖었다. 그는 “어린 시절 스포츠 행사만 있으면 아버지 손을 잡고 이곳으로 왔다. 스케이트 사준다고 해서 이 주변 상가를 돌아다니던 기억도 떠오른다”며 “프로야구 개막전을 지켜봤던 기억도 생생하고, 박철순 선수가 이 기념관을 찾아 과거 추억을 돌아보던 기억도 난다”고 미소 지었다.

 

그 목소리에는 ‘잊지 말아달라’는 메시지가 함께 담긴다. 그는 “요즘 세대들은 아무래도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를 거다. 일제강점기가 출발점이었다는 것도 생소하지 않을까 싶다. 식민 통치와 해방의 역사 그리고 근현대 한국의 회복과 발전이 모두 묻어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광복절을 맞아 기념관에 들러 그 발자국을 따라가보시면 좋을 것”이라고 활짝 미소 지었다.

 

기념관을 나오면 다시 DDP가 우리를 반긴다. 곡선에서 느끼던 건축미에는 이제 민족의 희로애락이 요동친 감정선이 그려진다. 공간은 사라졌지만, 역사를 아로새겨온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의 뜨거운 선물이었다.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앞에 마련된 안내 간판. 사진=스포츠월드 허행운 기자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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