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속이 꽉 찬 배구인생, 코트 밖에서도 멈추지 않는 최태웅의 토스… “배구에 미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최태웅 대한배구협회 유소년 이사가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뛰어난 선수는 뛰어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체육계 대표 명제. 여기에 시원한 일갈을 건넸던 레전드가 있다. 한국 배구 명세터 계보에서 김호철-신영철 다음 반드시 나오는 그 이름이 있다. 실체화된 문서도 없는 계보지만, 누구도 물음표를 건네지 않는 최고의 별, 바로 최태웅이다. 지금은 잠시 코트 밖에서 배구를 지켜보고 있지만, 아직도 자신의 배구 외연을 확장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20년 전, 10년 전 그리고 지금도 그는 ‘배구에 미친 사람’이 되고 싶다.

 

◆타고난 사령관

 

골목대장이었다. 친구들과 모여들면 꼭 무언가를 주도하는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배가 고팠다. 운동을 하러 오면 라면을 주고, 빵을 준다고 하니 강당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배구선수 최태웅이 시작됐다.

 

그는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때 운동 시작한 사람들은 다 공감할 것”이라 웃는다. “만약 주안초에 야구부가 있었으면 야구를 할 수도 있었는데, 공교롭게 그때 딱 해체됐다. 또 육상도 곧잘 했다. 그 기로에서 친구들을 따라 배구로 이끌려 들어갔고, 지금의 최태웅까지 왔다”며 배구가 인생을 파고든 그때를 추억했다.

 

재능은 대단했다. 자신은 모른다고 했지만, 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을 캐치한 선생님은 항상 최태웅을 따로 빼서 토스 훈련만 시켰다. 그는 “그게 세터 훈련인지도 몰랐다. 나만 혼자 훈련을 하고 친구들은 여러 명이 도는 걸 보고 ‘왜 나만 힘든 거 시키나’ 정도로 생각했다”며 “돌아보면 적성과 잘 맞았다. 항상 리더가 되는 걸 좋아하는 활발한 성격이었다. 세터도 마찬가지다. 코트에서 모두를 이끄는 자리다. 그 매력에 빠졌기 때문에 시작부터 끝까지 세터 외에는 생각해보질 않았다”고 껄껄 웃었다.

 

◆별 중의 별

 

최태웅 대한배구협회 유소년 이사가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반짝반짝 빛나는 길을 걸었다. “초중고 시절에는 대회 나가면 다 이겼다. 전관왕도 밥 먹듯이 했다. 꿈에 그리던 청소년(18세 이하) 대표팀에 뽑히면서 ‘아, 내가 배구를 조금 하는구나’ 싶었다”는 회상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서린다.

 

한양대 시절에는 51연승 선봉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9년 입단한 실업팀 삼성화재에서는 슈퍼리그 9연패와 77연승을 빚었다. 프로화를 마치고 출범한 V리그에서도 화려한 숫자는 이어졌다. 3번의 정규시즌 1위, 4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삼성화재와 함께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가슴에 품었던 태극마크도 그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사실 우승을 너무 많이 해봐서 일일이 다 기억은 안 난다”는 너스레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묻자, 시간은 1997년 시칠리아 유니버시아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세계배구 세 손가락 안에 항상 드는 이탈리아를 심지어 상대 안방에서 이겼다. 지금보다 훨씬 옛날 아닌가. 심판 편파 판정도 노골적이었는데, 그걸 이겨냈을 때 짜릿함이 배가 됐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고 눈빛을 번뜩였다.

 

◆암(癌) 투병을 뚫고

현역 시절 최태웅 이사의 모습. 사진=KOVO 제공

 

그의 서사에 시련이 없던 건 아니다. 시작은 말도, 탈도 많았던 이적이었다. 2010년 프로배구 첫 자유계약선수(FA) 이적생 박철우의 보상선수로 덜컥 라이벌 구단인 현대캐피탈행을 통보받았다. 본인 의지와 별개로 숱한 낭설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병환까지 그를 덮쳤다. 2010년 국가대표 차출 메디컬테스트에서 림프암이 발견된 것. 커리어를 넘어 인생을 흔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포기는 없었다. 동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암 때문에 운동 못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당시 김호철 감독님도 오히려 운동을 더 시켜주셨다. 너무 과하지도 않게, 딱 아픈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며 “이걸로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면 변명으로 느껴질 것 같아서 더 악착같이 달려들었다”고 회상했다.

 

림프암 수술 6개월 만에 코트를 밟을 수 있었고, 첫 시즌을 마치고 빠르게 완치 판정까지 받을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4시즌을 현대캐피탈과 동행했다. 하지만 병마의 지독함은 조금씩 그를 갉아 먹었다. 힘겨운 항암 치료 속에 체중이 눈에 띄게 빠졌고, 체력도 당연히 떨어졌다.

 

그는 “결국 나이가 나를 붙잡더라. 완치라고는 하지만 그 병도 영향이 있지 않았겠나. 똑같은 훈련을 해도 몸 회복이 늦고, 반응속도가 안 따라와줬다. 도저히 배구를 할 수 없는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선수로서) 마지막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최태웅 이사의 모습. 사진=KOVO 제공

 

◆당차게, 인생 2막으로

 

시원섭섭했던 은퇴. 하지만 ‘최태웅다운’ 다음이 기다렸다. 사상 최초로 현역 선수가 코치도 거치지 않은 채 사령탑에 올라서는 선례를 남기며 현대캐피탈 감독직에 올랐다. 그는 “선수 그만둔다고 하고 휴가를 다녀왔는데, 구단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감독직을 제안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두려움과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처음 제안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어떻게 운전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난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어 “당시 정태영 구단주(현 현대카드 부회장)께서 ‘나도 30대에 사장이 됐다. 자리가 너를 만들어 줄 거다’고 하신 한마디가 머리를 울렸다. 그렇게 정신없게, 하지만 당차게 제안을 수락했다”고 덧붙였다.

 

현대캐피탈 감독 시절의 최태웅 이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사진=KOVO 제공
현대캐피탈 감독 시절의 최태웅 이사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빚어낸 후, 헹가래를 받고 있다. 사진=KOVO 제공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일명 ‘스피드 배구’를 팀에 이식하면서 V리그 패러다임을 바꿨다. 삼성화재에서 숱하게 맛본 우승을 현대캐피탈에서 이루지 못했던 한도 풀어냈다. 부임 첫 시즌 정규시즌 1위 등극을 일구더니 2년 차에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펼쳐보였다.

 

그는 “파격적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런 시도들도 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일군 챔프전 우승은 정말 잊기 힘들다. 선수로서 가지고 있던 마지막 미련과 마음의 빚을 내려둔 최고의 우승”이라고 활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코트 밖으로

 

영원한 건 없었다. 영광으로 점철되던 지도자 커리어 역시 난관을 맞았다. 자연스러운 세대교체 속에서 현대캐피탈도 내리막을 걸었다. 결국 암흑기를 헤쳐 나가던 그는 2023년 12월, 구단으로부터 작별 통보를 받았다.

 

인생 그 자체인 배구를 내려놓을 최태웅이 아니었다. 코트 밖으로 눈을 넓혔다. 한 발짝 떨어진 그 거리를 활용해 해설위원으로 새로운 ‘배구 레슨’에 나섰다. 그는 “외국인 감독님들도 확 늘지 않았나. 그들과 싸우는 사람이 아닌 배우는 입장으로 배구를 새롭게 보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새 시즌에도 여전히 그는 마이크를 잡는다.

 

끝이 아니다. 지난 2월 대한배구협회 유소년이사로 선임되면서 한국 배구 발전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그는 “항상 코트에만 있으면서 의견 제시를 하는 수준에 그치다가, 이제는 행정가로서 바깥일이 돌아가는 방법들을 체득하게 됐다. 이걸 잘 아울러서 산적 과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태웅 해설위원의 모습. 사진=KOVO 제공

 

◆40년 철학을 담아

 

추락하는 배구 경쟁력을 붙잡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파트가 바로 그가 맡은 유소년 부문이다. 그는 “아직은 내가 오기 전의 협회 유소년 사업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인계 받고 적응하는 단계지만, 하나씩 풀어가려고 한다. 당장 우리가 ‘유소년’이라 부르는 정확한 정의도 협회, 연맹, 지자체마다 다 다르다. 갈 길이 멀지만 기초부터 다져가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협회가 지난 22일 출범시킨 2025 디비전리그에도 그의 ‘텃밭 배구’ 철학이 많이 투영됐다. 디비전리그는 전국 12개 지역에서 학교스포츠클럽 그리고 유소년 배구클럽 구분 없이 총 432개 팀이 참가하는 큼지막한 규모를 자랑한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9개 리그에 더해 대전·부산·광주까지 3개 리그가 진행될 예정이다.

 

최태웅 이사는 “안 그래도 배구 인구는 줄어가는데,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의 구분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지자체 지원금 등의 현실적인 문제나 전문체육인들의 자존심 같은 옛날 사고방식들이 유소년 클럽의 발전을 알게 모르게 막는 실정이다. 이 경계를 허무는 콜라보레이션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힘줘 말한다.

 

이어 “과거에야 국위선양을 위해 엘리트 육성만 외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배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배구를 즐기는 어린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재능과 실력을 발견하고 그 꿈을 확장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전문 선수 혹은 유소년 클럽 등의 구분을 없애고 선수 등록을 통일시켜야 한다. 대한체육회를 거쳐야 하기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배구에 미친 사람

 

 

최태웅 대한배구협회 유소년 이사가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월드 김용학 기자

 

아직 그가 걸을 길은 천리만리다. “물론 지도자 복귀에 대한 그림도 안 그린다면 거짓말이다. 밖에서 배구를 보며 배우는 것들이 많다. 이걸 발판 삼아 다시 감독이 됐을 때, 새로운 최태웅의 배구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숙성된 지도자가 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솔직한 계획표도 귀띔한다.

 

그러면서도 “일단은 지금 자리까지 온 만큼, 배구 발전에 이바지하는 게 먼저다. 언젠가 후배들이 나를 돌아볼 때, ‘배구에 미친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옛날부터 꾸준히 해왔다. 그 목표는 여전하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기에 배구인들이 힘들 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멘토로 내 이름이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라는 한마디와 함께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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