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굳이 직업을 물어보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어디 사느냐고 묻는다. 그 한마디로 사람의 평가를 마무리 한다. 아파트 평수와 동네가 곧 그 사람의 등급을 나타낸다. 직장이 아니라 사는 곳이, 연봉이 아니라 전용면적이 신분이 되어버린 사회다. 이제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 공간이 아니다. 신분증이고, 명함이고, 신용등급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아파트를 ‘사는’ 것이 아니라 ‘보유’하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에 어떤 아파트를 몇 채 갖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정보력, 투자력, 심지어 인생 전략까지 증명한다. 전세살이는 불안의 상징이고, 갭투자는 계층 상승의 마지막 사다리다.
한때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전셋집에서 시작해 내 집을 마련하고, 더 나은 동네로 이사 가는 레벨업 게임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집값은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가고, 월급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사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너무 미끄럽거나 아예 사다리 밑에 발도 못 내딪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파트는 이제 철저히 계층 분리 장치가 됐다. 같은 평수여도 단지가 다르면 값이 다르고, 같은 단지여도 동과 라인이 다르면 또 다르다. 물리적 거리보다 경제적 거리, 심리적 거리의 간극이 더 크다. 이 간극은 층간소음이 아니라 ‘층간소득소음’이라는 신조어로 설명된다.
웃긴 건 이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희망을 판다. 분양가 상한제를 기다리고, 재건축이 될 거라 믿고, 청약에 당첨되면 인생이 바뀔 거라 기대한다. 아파트가 사다리가 아닌 로또가 된 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결국 아파트는 계층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계층 고착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집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은, 이제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계층 위치 확인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불편하고 아프고, 때론 침묵하게 만든다. 집이 집이 아닌 시대, 우리는 어떤 신분증을 들고 살아가고 있을까.
더 무서운 건 이 불편함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계층 고착을 자조 섞인 농담으로 넘기고, 청약 낙첨을 인생의 평범한 서사로 받아들인다. 어느새 ‘나는 평생 집 못 사겠구나’를 너무 쉽게 말하게 된다. 희망 고문도 반복되면 체념이 되고 체념은 곧 현실이 된다.
정치권은 이런 심리를 잘 알고 있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공약은 재건축 규제 완화, 청년 주택 확대, 신혼부부 특별공급 비율 조정 등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 이대로가 유리한 사람들이 이미 아파트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다리를 걷어찬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파트는 사람을 모으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분리하는 장치가 되어가고 있다. 커뮤니티 시설은 폐쇄적이고, 단지 외부인은 차단된다. 출입구는 이중 삼중 보안으로 걸리고 택배는 단지 밖에서 수령하라는 ‘공동체 배달 거부’도 등장했다. 아파트는 ‘내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는 철학의 요새가 되고 있다.
과거엔 집을 사는 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지금은 집이 없으면 미래도 없는 사회가 됐다.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사람들은 아이 학군을 핑계 삼고 전세자금을 끌어모아 무리하게라도 내 집 마련에 올인한다. 그 과정에서 빚을 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결국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집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단순히 거주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요된 생존 전략일까? 어쩌면 아파트는 우리가 만든 가장 완벽한 신분 제도일지도 모른다. 벽으로 나뉘고 층으로 쪼개진 그 구조 속에 우리의 계급도, 꿈도, 불안도 함께 갇혀 있다.
아파트를 사야만 하는 시대, 아니 서울에 아파트가 없으면 점점 인정 받지 못하는 사회. 진짜 잃어버린 것은 사다리일까, 아니면 사다리를 오르려는 의지일까. 그 해답은 아직 벽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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