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유니폼을 입은 채 배트와 글러브를 든 선수들을 바라보면 문득 ‘야구 소년’ 시절의 자신이 떠오른다. 묵은 흙냄새와 경쾌한 방망이의 파열음,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베이스. 여기에 청춘들의 모습까지 겹쳐진다. 반평생 넘게 함께했건만, 야구는 변함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한다.
김동수 서울고 감독은 자타공인 한국 야구의 전설이다. 프로야구 LG와 삼성, SK, 현대, 히어로즈 등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굵직한 족적을 수차례 남긴 바 있다. 통산 2039경기 출전, 타율 0.263(5915타수 1556안타) 202홈런을 기록했다.
금빛과 인연이 깊다. 1990년 데뷔해 2009년까지 무려 20시즌을 활약한 가운데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7차례나 수확한 것. 한국시리즈(KS) 우승 반지는 4개다. LG(1990, 1994년)와 현대(2003, 2004년)에서 각각 두 번씩 정상에 올랐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프로 구단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면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고,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들기도 했다. ‘만학도’ 면모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대학원서 야구 공부에 매진했다.
이 와중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활짝 열었다. 2년 전 겨울 모교 서울고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 과거 김 감독이 전국을 주름잡던 고교야구 스타로 첫발을 내디뎠던 곳이다.
어느덧 수장으로도 2년 차를 맞이했다. 그의 야구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새 숨결을 불어 넣고 있다.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가 서울시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 운동장에서 김 감독을 직접 만났다.
◆모교 부임 ‘2년 차’에 전국 제패
“사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어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웃음).”
지도자로는 프로와 국가대표서만 활약했다. 낯선 아마추어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승부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바람과 더불어 모교의 부활을 이끌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훈련 방식부터 선수 파악과 대회에 적합한 로테이션, 진학 지도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며 ‘나만의 야구’를 채워가는 중”이라고 미소 지었다.
남들보다 늦은 스타트이기에 더 노력해야 했다. 이를 두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은 물론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지 않나. 매일 새롭게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값진 성과에 도달했다. 올해 봄 전국대회 정상에 우뚝 섰다. 김 감독이 이끄는 서울고는 4월 중순 열린 신세계이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부임 17개월 만의 결실이었다. 지난 2018년 이후 7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을 일군 서울고에도 의미가 깊다. 당초 개교 80주년인 2026년 우승 트로피 탈환을 목표로 모든 구성원이 의기투합했지만, 그보다 1년을 앞당긴 셈이다.
도리어 고개를 젓는다. 김 감독은 “내 공헌이 크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임 유정민 감독님부터 시작해 묵묵히 준비해 준 코치진, 늘 응원해 주신 학부모님들과 학교 관계자분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내 마음에 깊이 새기고, 또 하나의 동기부여로 삼고 싶다. 다음 트로피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오랜 시간이 흘러, 모교 유니폼을 다시 입고 후배들과 함께 그라운드에 선다는 것 자체가 각별하다. 자신이 받았던 배려와 관심을 제자들에게 돌려주는 것 역시 목표다 “내가 선수였을 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고 운을 뗀 그는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야구장 안팎에서 선수들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단순히 야구를 가르치는 데 그치고 싶지는 않다”고 전했다.
야구가 전부인 줄 알다가, 막상 그만두고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좋은 선수’ 이전에 ‘좋은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기다. 김 감독은 “다양한 길을 생각하게 하고, 열어주는 것도 지도자의 몫이다. 야구를 좋아하되, 그 하나만으로 선수들 자신의 모든 것을 정의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힘줘 말했다.
◆끝없이 의심하고, 끝까지 버텼다
야구를 향한 애정은 남다르다 못해 유별나다. 김 감독은 “야구는 어려서부터 내게 산소 같았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고, 태어나서 가장 잘한 선택은 야구를 시작한 일이었다”고 주저하지 않을 정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끼고 시작한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야구를 놓지 않았다. 틈틈이 시간을 내 한국체대 석사 과정을 밟았고, 포수 관련 논문을 쓰는 데 오랜 공을 들였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 다니며 공부했다.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부족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던 계기”라고 돌아봤다.
다만 자신을 향해 “특출난 재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김 감독처럼 프로야구 역사를 수놓은 포수에게 어울리지 않은 표현이다. 그럼에도 사뭇 진지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겸손’의 자세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박동희(롯데), 장종훈(빙그레-한화) 등 기라성 같은 슈퍼스타들이 동기였다. 그들에 비하면 늘 초라했다. 또 선수로 뛰면서 항상 슬럼프와 싸워야 했다. 이를 더 악물고, 잘하고 싶어서 훈련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베테랑 나이가 된 후에도 끈기 있게 버틴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마흔이 넘도록 선수 생활을 이어간 바 있다. 지금이야 ‘롱런’하는 케이스가 부지기수지만, 그 시절에는 결코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김 감독은 그 비결로 “스스로를 향해 계속 질문을 던졌기에 가능했다”고 답했다.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고 경기장에 들어섰다”면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몸 상태는 인정해야 한다. 전성기처럼 많은 경기를 소화할 수 없지만, 분명히 내게 주어진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수행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몸과 마음이 필요하다. 매일 그게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고민한 흔적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제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어요. 롱런도 거기에 달린 겁니다.” 이 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다. 노력이 재능을 뛰어넘는다고 믿는다. 지도자가 된 오늘도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대목이다. 김 감독은 “결국 오래 살아남는 선수는 실력이 아니라 자세에서 갈린다”고 말한다.
여전히 그의 삶 중심은 야구로 가득하다. 고교 사령탑으로서 이제 막 본궤도에 오른 김 감독이 모교 후배들과 함께 써 내려갈 다음 장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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