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훈의 필모그래피에 안주라는 단어가 없다. 시리즈물의 다크히어로에서 독립영화의 날 선 시선까지 직접 택한 캐릭터는 매번 새롭다. 이번엔 넥타이를 바짝 조인 투자사 직원이다. 영화 소주전쟁을 통해 이제훈은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실화보다 더 리얼한 자본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작품은 1997년 IMF 외환위기, 국보 소주 회사가 곧 인생인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오로지 성과만 추구하는 글로벌 투자사 직원 인범(이제훈)이 대한민국 국민 소주의 운명을 걸고 맞서는 이야기를 그렸다. 외환위기 당시 실제 경영난으로 해체된 진로그룹 인수전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제훈이 연기한 인범은 글로벌 투자사 솔퀸 소속의 야망가다. 국보소주를 삼키겠다는 야심을 숨기고 위기를 해결해주려는 것처럼 회사에 접근한다.
숫자와 성과에만 반응하는 비즈니스맨이지만 영화에서는 단순한 악역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제훈은 “인범은 선악이 분명하지 않다. 목표를 향한 냉정함과 종록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라고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이제훈이 인범을 연기하며 느낀 감정은 특별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개인의 기억과 맞물렸다. 이제훈은 “당시 부모님이 쌀 가게, 가스 배달, 추어탕 전문점까지 다양한 자영업을 하셨다. 저도 배달 등을 하면서 이따금 일손을 보탰다. 그런데 장사가 너무 안됐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새벽마다 일용직을 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쉽지 않은 상황임을 느꼈다”라며 “대학교 1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낼 때, 아버지가 대출을 알아보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집 상황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됐다. 성인이 되고 가장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다시금 아버지 세대의 애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시절을 겪은 분들은 그때를 기억할 수 있고, 그때를 겪지 못한 분들은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간접경험을 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기업의 지배 구조, 외국 자본 유입, 자본의 논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이제훈은 “모든 국민이 부채를 갚으며 성장해왔는데, 현실에서 인범 같은 생각을 갖고 행해지는 도덕적 해이들을 보면 답답하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누고 싶었다”라고 개인적 의견을 밝혔다.
한 작품에서 처음 만난 유해진과의 호흡이 기억에 남는다. 이제훈은 “한국영화에서 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빼놓고 영화를 말할 수 있을까, 저희 세대에게 유해진 선배는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라며 “대중이 볼 때도 편안한 매력이 있는 배우인데, 현장 분위기도 정말 편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함께하면 하루를 웃으며 마무리한다. 저도 이런 부분을 닮고 싶더라”고 말했다.

올해로 데뷔 20년 차다. 여전히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 중인 그는 아직 못 만나본 역할을 통해 자신을 녹여보고 싶다는 각오다. 그는 “배우로서 삶을 탐구하고 지속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몰두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며 “죽을 때까지 다른 가치에 타협하지 않고 배우로서 온전히 그 순수함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직업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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