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벚꽃은 졌는데 마늘축제, 고구마축제, 수박축제 줄줄이 대기 중이다. 달력을 펼쳐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축제 계획으로 주말이 꽉 차 있다. 벚꽃놀이 사진을 SNS에 올린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늘 좋아하세요?”란 멘트가 적힌 의성 마늘축제 홍보물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대한민국은 지금 ‘축제 인플레이션’ 시대다. 봄이면 꽃 축제, 여름엔 특산물 축제, 가을엔 단풍과 전통시장 축제, 겨울엔 빛 축제와 송년 음악회. 명색이 평범한 주말이 귀해졌다. 어느 주말은 송이버섯 축제, 어느 주말은 치즈 축제다. 심지어 낙동강 세계 평화 문화 대축전이라는 이름의 축제도 있다는데, 이쯤 되면 ‘대축전 없는 강은 강이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전국적으로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형 축제도 있다. 진해 군항제, 보령 머드축제, 춘천 마임축제, 제주 유채꽃 축제. 조금만 눈을 돌리면 구례 산수유 꽃축제, 담양 대나무 축제, 울산 고래축제, 횡성 한우축제, 순창 고추장 축제, 영동 포도 축제, 해남 고구마 축제, 함안 수박축제, 인제 빙어축제까지 쏟아진다.
전국의 특산물이 다 한 번쯤은 축제로 승화되는 중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특산물 축제 지도’를 따로 제작해도 될 판이다.
그런데 축제 현장에 가보면 묘하게 데자뷔 현상이 일어난다. 이 축제가 저 축제 같고, 저 축제가 또 다른 축제와 비슷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먹거리 부스, 지역 농특산물 판매장, 유명 가수 초청 공연.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면 마늘 이야기는? 고구마는 언제 나오나? 수박의 숨은 매력은 뭔가? 정작 지역 고유의 스토리는 찾기 어렵다. 마늘축제에 가면 닭강정과 떡볶이 줄이 가장 길고, 고구마축제에 가면 스테이크가 인기다. 특산물은 행사장 입구 부스 몇 군데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이번엔 누구 공연 오냐?” 이 질문이 축제의 품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현실도 씁쓸하다. 그래야 사람들이 찾아오니 어쩔 수 없다. 물론 공연도 좋고 먹거리도 좋지만, 축제라는 건 결국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오래 기억에 남는’ 이벤트가 된다.
좋은 사례도 있다. 춘천 마임축제처럼 장르의 특성을 살려 독창적인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은 경우가 있다. 보령 머드축제는 머드라는 지역 소재를 축제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녹여냈다. 이런 축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그 지역만의 색깔이 선명하다.
반면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예산 확보 후 일단 벌여 놓고 보는 축제도 많다. 주민들의 피로감도 만만치 않다. 도로 통제, 쓰레기 증가, 반복되는 식상한 콘텐츠. 이때다 싶은 바가지 가격 문제, 일회용품으로 가득한 행사장을 보면 환경오염 걱정이 먼저 드는 경우도 있다.
물론 축제는 많은 긍정적인 기능도 한다.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 관광객 유입으로 인한 경제 효과, 주민들의 문화 욕구 충족. 코로나로 움츠렸던 시간 이후 다시 거리에 활력이 도는 모습은 참 반갑다.
하지만 이제는 한 단계 더 고민할 때다. 왜 우리는 이 축제를 열고 있는가? 그저 옆 동네가 해서 우리도 하는 건 아닌가? 그 지역만의 이야기는 제대로 담겨 있는가?
특색 없는 축제 100개보다, 스토리 있는 축제 1개가 더 오래간다. 양적인 팽창보다 질적인 깊이가 필요한 시대다. 지금처럼 무작정 열고 보는 축제는 언젠가 사람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말해본다. “이제 벚꽃은 졌는데 마늘축제, 고구마축제, 수박축제 줄줄이 대기 중.” 그 속에 마늘의 스토리, 고구마의 역사, 수박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면 그게 진짜 축제다. 사람들이 또 찾아오고 오래 기억하게 될 진짜 이야기.
그런 축제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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