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맷’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부터 세계 진출을 꿈꿨다. 프로그램 제작사이자 콘텐츠 포맷 개발 기업인 스튜디오 씨알(STUDIO CR)의 조은이 이사는 방송사 위주의 한국 포맷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어 창작자이자 제작사의 주체로 지식재산권(IP)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인물이다.
“도전을 해야 미래가 있다”라 말하며 여전히 질문하고 실천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지금 스튜디오 씨알은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한국에서 온 씨앗 하나를 뿌리려 한다.
◆왜 포맷인가, 왜 지금인가
방송계에서 포맷은 특정 프로그램에서 회차마다 변하지 않고 지켜지는 핵심 구성안을 일컫는다. 한 마디로 설계의 영역이다. 조 이사는 “유명 연예인이 나와야 성공하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설계 안에 들어오면 작동하는 프로그램”이라는 눈높이 설명으로 이해를 돕는다. 누구나 아는 말 같지만, 아무나 설명하진 못한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수만이 다루는 고난도의 영역이다.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낯설고 까다로운 장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은 포맷 산업에 익숙하지 않다. 시청자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고, 자극의 역치가 높아져 웬만큼 새롭지 않으면 눈길을 끌지 못한다. 한국 예능판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많아진 이유다. 반면 글로벌 시장은 지금도 스튜디오 기반의 버라이어티, 음악쇼를 선호한다.
조 이사는 26일 “미국에서는 NBC가 더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27번째 시즌을 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엠넷에서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방송됐다. 50여개 국에서 방송이 됐다고 하는데, 포맷 판권은 네덜란드에 있다”며 “한국에는 MBC 복면가왕이 그 예다. 좋은 포맷은 어느 나라, 어떤 출연자가 등장해도 제작이 가능하다. 구조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산업”이라고 설명했다.
스튜디오 씨알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글로벌 포맷랩 운영 지원사업을 통해 이 시장에 진입했다. 창작자 10~20명을 모아 교육하고, 함께 기획하고, 글로벌 시장을 향해 문을 두드렸다. 조 이사는 “5년 전엔 산업적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였다. 소수인 한국 포맷 전문가들의 수업을 통해 한 명의 창작자로서 포맷의 기본을 익혔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칸에서 티끌이 된 날,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조 이사는 포맷 기획 3년 차부터 매년 10월 프랑스 칸으로 향했다. 세계 최대 방송 콘텐츠 마켓인 밉컴(MIPCOM) 때문이다. 전 세계 바이어와 배급사, 제작사가 모여 판매와 교류를 잇는 콘텐츠 장터다.
한국은 방송사 중심인 까닭에 독립 제작사는 설 자리가 없다. 조 이사는 “팀장 PD 1명과 백팩 하나 매고 갔다. 칸에 가기 전 바이어들에게 메일 300통 이상을 보냈지만 회신 하나 없었고, 단 한 건의 미팅도 못 잡았다”라고 첫 방문 당시를 돌아봤다.
낙담 속에서도 그는 주저 앉지 않았다. AI 녹음기로 강연을 녹음하고, 밤마다 번역해 공부했다. 조 이사는 “그때 정말 제가 우주의 먼지 같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오히려 내 속의 도전 정신을 일깨운 것 같다. ‘그래, 당장 결과가 나지 않으면 어때. 일단 하자’ 싶더라”라고 작가로서 수십년 가까이 쌓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4년 차였던 지난해 성과가 나왔다. 1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ATF(Asia TV Forum&Market)에서 중국 방송국 후난TV의 OTT 망고 티비가 주최한 기획안 공모전에 참여했다. 톱5 진출의 쾌거와 함께 대표로 포맷 피칭에 참여했고, IP 진출의 청신호를 켰다.
다음은 올해 2월 첫 삽을 뜬 MIP런던이다. 미국 폭스(FOX) 주최 기획안 공모에 70개국 기획안이 몰렸고, 스튜디오 씨알의 IP가 글로벌 포맷 기획안 중 다시 한 번 톱5에 진출했다. 유일한 한국 진출작이다. 조 이사는 450명 앞에서 영어로 포맷을 설명했고, 바이어들이 명함을 주며 말을 걸어왔다. 조 이사는 “아무도 우리를 몰랐지만 이제는 수많은 글로벌 회사와 네트워크가 가능하다. 모두가 성실함과 진정성으로 걸어온 결과라 더욱 뿌듯하다”라며 “이 한 걸음이 단지 운이 아닌, 성실함과 진정성의 결과였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구상하는 사람과 구현하는 사람…콘텐츠도 존중이 중요
스튜디오 씨알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조 이사의 오랜 비지니스 짝꿍인 김태용 대표다. 포맷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해봐, 가보자”라는 짧고 굵은 응원이 있었다. 조 이사가 구상을 하면 구현은 김 대표가 한다.
조 이사는 “콘텐츠 협업은 서로의 세계관을 존중하는 과정”이라며 “막내 작가와 조연출로 만나 20년을 넘게 함께했다. 의견이 부딪치고, 생각이 엇갈릴 때도 있었지만, 결정의 순간에는 서로를 설득하고 존중했다”라고 남다른 호흡을 전했다.
씨알 미디어로 17년을 함께 했고, 지난해 8월 사명을 바꾼 뒤 드라마 제작까지 확장해 영상과 관련한 모든 것을 만들고 있다. 드라마 부문에는 미생·도깨비·보이스·시그널 등을 흥행시킨 이찬호 프로듀서를 드라마사업본부 대표로 영입했다. 2025년은 그간의 축적된 기획력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콘텐츠 종합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마중물이 될 해다. 새로운 포맷, 새로운 파트너십이 그 흐름을 견인하고 있다.
◆단단한 책임감…콘텐츠 제작의 기본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영상 제작에 관심이 쏠리는 시대다. 더욱이 콘텐츠 산업은 누구보다 빠르게 변하고, 기준은 점점 높아진다. 그래서 조이사는 언제나 1인의 맡은 역할을 강조한다. 또 나 하나가 무너지면, 그 집은 무너진다는 단단한 책임감이 기본이다. 스튜디오 씨알의 원칙은 단호하다. ‘클라이언트가 오케이여도, 우리가 오케이 아니면 온에어되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조 이사는 ‘이 일을 하기 위한 기본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태도”라고 단호히 답했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기본 실력은 당연한 부분이고, 태도를 갖춰야 한다. 자신이 완성형이 아니란 걸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며 “미완의 나를 위해 자양분을 넣어줘야 성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송쟁이들은 주말도 없이 일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급한 마감이 아니면 주말을 보장한다. 이 시간에 직원들이 스스로를 위한 투자를 통해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며 “주말에 한 끼 정도는 안 가본 곳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도 투자다. 좋은 작품이나 새로운 창작물을 보는 것도 방법이다. 아이디어는 유튜브 세계에서 찾을 수 있지만, 경험은 쌓을 수 없다. 경험을 기꺼이 흡수하는 태도가 미래 세대에서 중요해질 것”이라고 짚었다.
한국 포맷 산업에 과감히 진출하고,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는 사람. 지금 이 순간,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구조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 조은이의 이름은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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