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노보드는 평생의 동반자죠.”
무더위에 강한 부산 소년은 10살 때 처음 마주한 눈밭에 마음을 뺏겼다.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추위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스노보드를 타는 한 외국인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정작 손에 든 건 노란색 눈썰매였다. 다음엔 꼭 스노보드를 타겠다고 결심했다. 한참을 부모님에게 떼를 쓴 뒤 얻게 된 스노보드,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지명곤 일본 국가대표 B팀 코치는 “스노보드로 코치까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더 오래 해서 스노보드계 전반에 도움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개척자가 만든 최초의 역사
처음 스노보드를 타기 시작했을 땐, 한국에 스노보드를 탈 수 있는 스키장이라곤 무주 덕유산 리조트스키장뿐이었다. 지금이야 한국에 있는 모든 스키장에서 스노보드를 탈 수 있지만,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 선수의 길은 더 멀고 험난했다. 그럼에도 한번 마음을 뺏긴 스노보드는 놓을 수 없었다. 지 코치는 “정말 모든 게 열악했다. 어떻게 선수가 되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스노보드를 타는 대학생 형들과 뉴질랜드로 여행 겸 훈련을 처음 시작했다”며 “이후 대학생 형들이랑 팀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든든한 짝꿍이 있었다. 지 코치는 친형 지원덕과 함께 365일 붙어있으면서 국가대표 형제로 거듭났다. 형은 경쟁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지 코치는 “형에게 참 고맙다.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됐을 때가 고등학생이었는데 협회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원도 없었다”며 “해외 대회를 나가고 싶을 땐 영어 잘하는 형이 직접 메일을 보내서 한국 선수들의 참가 신청을 다 해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모두의 노력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가 됐다. 지 코치는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AG) 남자 회전에서 은메달로 한국에 첫 메달을 안겼다. 한국 스노보드 최초의 메달을 탄생시킨 순간이었다.
배경엔 철저한 계획이 숨어있다.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적응하기 위해 일본 고등학교 팀에 들어가 함께 훈련했다. 지 코치는 “설질이나 날씨 등 분위기를 미리 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크라크’라는 팀에 들어갔다. 당시 훈련을 같이 하던 선수들 모두 AG 출전 선수였다”며 “메달 색이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일본에 가서 훈련한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은메달, 내 룸메이트인 일본 선수는 금메달을 땄다”고 웃었다.

◆현실의 벽이 그린 쉼표
AG에서 한국 스노보드 최초 메달이라는 굵직한 이정표를 세웠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환경은 열악했고 지원은 부족했다. 무관심도 버티기 힘들었다. 지친 지 코치는 2004년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정말 많은 지원을 받았기에 더 많은 지원을 바라기 어려웠다. 또 메달을 땄으니 엄청나게 이슈가 돼서 달라질 줄 알았다. 근데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없었다. 아르바이트하거나, 전지훈련을 가려면 장비를 팔아야 하는 삶이 계속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마침표는 쉼표가 됐다. 2005년 후원 업체가 있는 수상스포츠 웨이크보드로 종목을 전환했다. 조금 더 나아진 환경이지만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역시 스노보드였다. 웨이크보드를 타기 어려운 겨울엔 스노보드 대회를 뛰기도 했다. 쉬었음에도 선두는 여전히 지 코치의 것이었다. 망설이던 순간,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그는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선재 NSA팀 코치님을 만났다. 자신이 협찬받은 물건을 다 주시면서 ‘이제 다시 시작하자’고 하셨다”며 “당시 강원도 둔내 스노보드 중고등학교 코치를 맡고 계셨다. 서브 코치로 들어가서 훈련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배우는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 모두 선수였다. 국제 대회에서는 이선재 코치님과 저, 제자들 모두 경기에 나섰다. 정말 신기한 광경 아니냐”고 웃으면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미소 지었다.
2010년 한국 스노보드계에 첫 실업팀이 생겼다. 횡성군청에서 실업팀을 만들면서 지 코치는 처음으로 안정적인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저도 월급을 받으면서 훈련비를 안 내고 훈련하고, 장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거듭 감사함을 전했다.
긴 쉼표에도 후회는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지 코치는 “오래 쉬었던 만큼 성장한 어린 선수들도 많았고, 기량을 올리는 데 정말 힘들었다”면서도 “터닝포인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1등을 하다 보니 건방진 면이 있었는데, 사회에 나오면서 사람이 됐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던 것 같다”고 활짝 웃었다.

◆유쾌한 ‘강제’ 은퇴
선수 지명곤의 마지막 목표는 평창 동계 올림픽 출전이었다. 다시 스노보드에 몸을 맡기면서 2017년 여러 국제 대회에서 상위권에 드는 등 좋은 성적을 일궜다. 모든 신경을 올림픽에 쏟은 탓일까. 드리우는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부상까지 겹쳤다. 자국 쿼터로 출전 기회가 있었으나, 혹시 모를 불이익에 포기했다.
피니쉬 버튼은 아직 누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버튼을 배우이자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하는 박재민이 대신 눌렀다. 2019년 2월 강원도 평창에서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월드컵이 열렸다. 여느 때처럼 지 코치는 레이스를 펼치기 위해 출발선에 섰다. 현장에서 진행을 맡은 박재민의 음성이 퍼졌다. “지명곤 선수가 마지막 경기를 뜁니다!”
어리둥절한 상황. 지 코치는 박수 속에 레이스를 마쳤다.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이 대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번복하기도 머쓱했다. 지 코치는 “박수를 정말 많이 받았다. 월드컵이다 보니 친했던 해외 선수들도 다 와있어서 다들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주더라. 사실 조금 더 타고 싶었다”면서도 “이렇게 된 거, 이게 나의 길이겠구나 싶었다”고 웃었다.
이어 “재민이에겐 왜 은퇴시켰느냐고 자주 뭐라고 했다. 재민이는 매번 ‘하는 거 아니었어?’라고 답했다”며 “워낙 친한 사이다. 제 결혼식 사회도 재민이가 봐줬다.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이후 한국 대표팀 상비군 코치를 했는데 시기적으로 딱 맞아서 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국 최초 외국 국가대표팀 코치
강제 은퇴 이후 지 코치는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 한국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는 등 한국에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해외에서 끈질긴 러브콜이 이어졌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선수의 ‘레벨 업’을 만들어보자는 도전과 가정의 안녕을 위해 지난해 11월 일본 국가대표 B팀에 코치로 합류했다. 아오모리 동계AG의 인연과 함께 개척자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 지도자가 외국 국가대표 스노보드팀 코치를 맡은 것 역시 최초다.
지 코치는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외국에서 요청을 많이 받았다. 한국 선수들 실력이 올라가고 있는 타이밍이라 더 노력하고 싶었다. 요청은 5년 정도 계속됐다. 당연히 한국 대표팀이랑 하고 싶어 버텼는데, 도전도 하고 싶더라. ‘일본 B팀 선수를 잘하고 있는 한국 선수만큼 올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일본에 가게 됐다”고 미소 지었다.
그는 “한국 국가대표팀 스태프들은 정말 힘들다. 선수촌이나 해외에 있는 시간이 길다. 가정을 지키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면서 “일본 국가대표팀은 시스템이나 문화가 다르다 보니, 오히려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 중순까지는 거의 한국을 왔다갔다했지만, 아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생겨서 마음이 편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팀을 맡은 지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첫 번째 목표를 이뤘다.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월드컵 티켓 6장을 확보했다. 다음 목표는 올림픽이다. 지 코치는 “현재 일본팀에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2~3명 정도인데,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이 추가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 코치의 도전은 스스로에게도, 한국 스노보드계에도 의미가 있다. 지 코치를 따라 다른 한국 지도자들도 해외 진출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지 코치는 “국내 지도자 자리는 적다 보니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해외로 시선을 돌리면 자리는 많다. 이번에도 일본에서 추가로 한국 코치를 영입하려고 한다”며 “실력을 키워서 해외 팀으로 나가면 된다. 더 많은 자리가 생기고, 좋은 예가 될 수 있도록 제가 첫 단추를 한번 잘 끼어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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