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조선 시대 인조 임금과 그를 추대한 당시 집권층인 서인 세력이 광해군 만큼의 국제 질서에 대한 일말의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애당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이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명을 위협할 만큼 세력이 커지자 실리를 선택했건만 인조는 그 후금이 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국을 선포할 만큼 강대해졌을 때조차 친명정책만 고집하다가 나라를 전란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요즘처럼 국민 모두가 정치 부재를 절감할 때가 있을까. 탄핵정국에 더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세계 무역질서가 흔들리면서 전 세계가 분주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컨트롤 타워가 부재한 탓이다. 위기감은 커지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무력감만 커진다. 그러나 정치 부재만이 문제가 아니다. 앞서 예로 든 인조의 사례처럼 국제 감각이 없는 정치 지도자는 나라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와 연관된 안보 위기는 군사 위기보다 더 극심한 재난이 될 수 있다.
최근 국제 사회에도 크나큰 변화가 예상된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조만간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쟁 종결 협상에 나선 것이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전쟁 당사자국인 우크라이나마저 배제한 채 러시아와 현 상태에서 종전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추진 중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국제 사회에서 여전히 가장 큰 힘을 지닌 미국이 정권 교체 후 러시아에 우호적인 분위기다. 이 때문에 우리 산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인 러시아 시장이 다시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 러시아 내 공장을 재가동하면서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란 성급한 장밋빛 낙관론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이들 기업은 러시아에서 잘 나갔다. 현대차만 놓고 봐도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건설했고 2020년에는 연간 10만대 생산능력을 갖춘 GM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도 인수하면서 생산 규모는 전쟁 직전인 2021년 기준 23만4000대까지 늘었다. 특히 같은 해 기아와 함께 현대차는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차 브랜드 1∼2위를 휩쓴 바 있다. 2023년 12월 현대차그룹은 전쟁으로 가동이 중단된 러시아 공장을 매각해야 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미국과 서구권 등 대부분의 나라가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발동했고 이에 우리도 동참해야 했기에 러시아 내 우리나라 공장에서의 생산 활동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시장조사업체인 온라인 마켓 인텔리전스(OMI)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현지에서 가장 사랑받는 글로벌 브랜드 1위 자리를 유지했고 LG전자도 상위권을 유지 중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우리의 빈 자리는 이미 중국이 모두 차지한 상태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 분석기관 오토스탯(아브토스타트)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브랜드 10위권에 8개가 하발, 체리, 지리 등 중국산이다. 가전도 마찬가지다.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공급이 제한되면서 중국, 튀르키예, 벨라루스 등 우호국 가전 제품 비중이 크게 증가한 반면,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급감하고 말았다.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부터 경제 분야에서 만큼은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미국과 유럽 중심의 일방적인 경제 제재에 동참하는 것과 동참하지 않고 평화협상에 외교의 초점을 맞추고 경제는 아예 분리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손해는 없었을 것이다. 국제 상황에 대응할 때 어느 일방에 경도되는 것이 언제나 국익에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하는 지혜를 가진 정치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다.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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