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이제훈, 구교환 주연 한국영화 ‘탈주’가 누적관객 200만을 돌파했다. 언론미디어를 통해 발표된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순간이다. 27일 토요일까진 누적관객 219만9238명. 이로써 2024년 개봉작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영화는 ‘파묘’ ‘소풍’ ‘범죄도시 4’ ‘핸섬가이즈’ ‘건국전쟁’, 그리고 ‘탈주’까지 총 6편이 됐다. 손익분기점이 애매하지만 ‘대충’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 ‘시민덕희’와 ‘그녀가 죽었다’까지 더해 봐도 7개월 동안 총 8편. 당연히 빈약한 숫자다. 그 뒤로 ‘외계+인 2부’ ‘설계자’ ‘하이재킹’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원더랜드’ 등 기대작들의 대대적 실패가 깔린단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 같은 1~7월 성적표에 언론미디어 해석은 일목요연하다. 중급영화, 즉 누적관객 100~200만에서 손익분기가 이뤄지는 중간급 규모 영화들에서 한국영화 미래를 본단 식이다. ‘파묘’나 ‘범죄도시 4’ 등은 그 선에서 벗어나 350만 정도 관객을 손익분기로 삼은 대형영화들이지만, ‘탈주’ ‘핸섬가이즈’ ‘시민덕희’ ‘그녀가 죽었다’ 등은 확실히 저 중급영화 선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게 될성부른 중급영화 한 편이 웬만한 블록버스터보다 효자노릇 할 수 있으니 중급영화 제작을 활성화시켜야 한단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렇게만 보면 지난 1년여 동안 꾸준히 제기된 ‘위기의 한국영화’ 상황도 리스크가 적은 중급영화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해나가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단 쉬운 해법이 나올 듯도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중급영화는 의외로 한계도 명확하고 다루기도 상당히 까다로운 부류이기 때문이다.
일단 중급영화가 영화산업 ‘허리’가 돼줘야 한단 주장 자체는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또 아니다. 모든 흥행산업은 결국 유행산업이며, 유행산업 속성을 놓고 봤을 때 거대 제작비가 투여되는 블록버스터 역할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대형영화가 몰고 오는 특유의 화제성과 이벤트성이 영화란 미디엄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를 텐트 폴대처럼 띄워 올려 다른 콘텐츠까지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도록 시장 공간을 키워준다는 것. 이런 역할을 맡기 힘든 중급영화는 시장 중심으로 작동하긴 어렵단 얘기다.
또 있다. 중급영화 기획 자체의 까다로운 면면 문제다. 일단 중급영화는 압점 전략을 펼치기가 힘들다. 근래 ‘마니아 공략’이란 식으로 거론되는 시장 세분화 전략 말이다. 예컨대 중․노년층 타깃의 ‘소풍’처럼 온전히 좁은 타깃층을 노리고 기획 자체를 ‘마니아화’시키기엔 제작규모가 크다. ‘소풍’처럼 관객 30만 명만 넘어도 손익분기를 넘기는 규모는 또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블록버스터들처럼 규모 자체를 셀링 포인트 삼을 만큼 제작비가 투여되는 영화도 아니니 그만한 화제성을 불러오기도 힘들다. 이러니 블록버스터나 저예산영화 기획이 중급영화보단 덜 까다롭단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러니 현 시점 중급영화 필승전략은 오로지 ‘입소문’ 하나로 귀결되는 분위기다. 얼핏 영화만 잘 만들면 된다는 정론에 가까워 보이지만, 엄밀히 저 ‘입소문’이란 것도 소위 ‘운때’를 많이 탄단 점에서 전략이라기보다 요행수에 더 가깝단 평가가 많다. 이렇듯 중급영화 활성화란 화두는 여러모로 난제의 연속인 게 사실이지만, 어쩌면 올해 상반기와 시장구도가 비슷했던 2018년 상반기 상황에서 힌트를 찾아봐야 할 수도 있겠다.
2018년 상반기도 한국 블록버스터들이 차례로 쓰러지던 때였다. 제작비 130억 원짜리 ‘염력’, 110억 원이 투여된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의외로 100억 원 넘게 들어간 ‘7년의 밤’ 등이 모두 손익분기를 넘기지 못한 채 흥행전선에서 패퇴했었다. 대신 58억 원 제작비의 ‘그것만이 내 세상’, 55억 원이 들어간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중급영화들이 분전하면서 당시도 한바탕 ‘중급영화 대세론’이 펼쳐졌었다.
당시 이 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수 년 걸쳐 블록버스터들이 워낙 사회파적 접근에 몰입돼 피로감이 커졌고, 반면 중급영화들은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고 오직 장르성에만 충실해 이를 피해갈 수 있었단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또 다른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규모는 중급이어도 가장 티켓파워 강한 스타 이병헌과 손예진을 앞세운 ‘스타파워 영화’들이었단 점이다.
물론 지금은 영화스타들 티켓파워 자체가 의심받는 시점이지만, 대부분 블록버스터 규모에서 손익분기를 못 넘기는 경우들만 언급되다보니 그런 의구심이 나오는 것뿐이다. 스타배우의 존재는 중급영화 규모 정도는 확실히 리스크를 덜어주는 구석이 존재한다. 나아가 극장 흥행을 마치고 2차 시장에 진입했을 땐 모두가 알 만한 스타의 존재여부가 오히려 극장서보다 더 중요한 선택요소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애초 블록버스터야말로 기획과 연출 차원 매력이 절대적 흥행 요소로 작용하는 이벤트 영화들이기에 스타배우 기용의 필요성이 떨어진다고 볼 만하다. 그래서 할리우드서도 각종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나 슈퍼히어로영화 등에서 굳이 스타배우 캐스팅을 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스타들을 필요로 하는 건 오히려 중급영화들이며, 반대로 스타배우들 입장에서도 그 성공 지분을 온전히 가져가며 스타성을 과시해볼 수 있는 건 중급영화 쪽이라 볼 만하다.
돌이켜보면 언급한 2018년 상반기엔 중급영화 성공사례만 있었던 게 아니다. 손익분기점이 관객 수 80만 명 선에 맞춰졌던 제작비 15억 원짜리 저예산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그 배 가까운 150만 관객을 동원하는 이변도 벌어졌었다. 그리고 그 성공 비결은 김태리와 류준열이라는, 아직 티켓파워가 검증되진 않았지만 포텐셜은 높다고 평가받았던 젊은 배우들 스타파워 덕택이었단 해석이 뒤따랐다. 이후 김태리와 류준열은 ‘작은 영화’에서의 성공사례를 통해 그 성공 지분을 평가받으며 연속적 대형영화 캐스팅을 이어가게 됐다.
안 그래도 영화시장에 ‘대박’과 ‘쪽박’만 있을 뿐 ‘중박’이 사라지는 통에 한국영화산업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단 우려다. 여기서 저 ‘중박’을 통해 시장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게 바로 스타배우의 존재고, 또 ‘중박’이 빛을 발할 지점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중급영화들이리란 점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높은 출연료 문제를 높은 러닝개런티 책정으로 해소하는 등 다양한 방안들을 통해 현 시점 반드시 고려해볼 만한 전략이다.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