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스포츠] 천직 찾은 ‘파란만장’ 저니맨… NC 전민수 코치 “보이지 않는 벽, 허물겠습니다”

프로야구 NC 전민수 코치가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김두홍 기자 kimdh@sportsworldi.com

 

“지금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겸손한 코치이고 싶습니다.”

 

굴곡진 선수 생활이었다. 전도유망한 능력치, 야구를 향한 패기와 열정으로 프로 무대를 밟았지만 녹록지 않았다. 불의의 부상이 자꾸 발목을 잡았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3번의 방출이 이력을 채웠음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끝내 리그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주인공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코치’ 전민수는 지도자 생활만큼은 조금 다른 시나리오를 꿈꾼다. 자신을 받아준 마지막 팀, NC에서 그의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

 

◆치기 어렸던

 

어린 시절, 그저 운동장을 뛰노는 게 좋았다. 그는 “원래 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못해서 해체되더니 야구부가 창단되더라. 그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다”며 야구공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그렇게 안양 평촌에서 시작됐던 그의 야구 인생은 잠재력과 재능을 발판 삼아 서울 유학까지 이어졌다.

 

사당초-이수중-덕수고를 거치며 중심 타자로 성장했다. 고2 시절에는 이영민 타격상까지 수상했다. 그렇게 2008년 드래프트에서 2차 4순위로 현대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성할 수 있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전 코치는 과거를 짚으며 ‘시작’에 대한 아쉬움을 고백했다.

 

그는 “꿈을 위해서 달렸어야 했다. ‘어떤’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명확한 꿈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는 ‘그냥’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공부하는 친구들도 그렇지 않나. 꿈의 과정에 대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대학교 자체가 꿈이 돼버리는 것과 비슷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렇게 지명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나니 프로 와서 붕 떠버렸다. 대학교 합격하고 갑자기 방황하는 케이스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확 높아진 야구의 수준에 일종의 벽도 느껴야 했다. 180도 다른 환경에 일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간혹 1군에 포함됐지만 15경기 20타수 무안타라는 허무한 결과만 남았다. 그럼에도 유망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경찰청 야구단으로 향해 야구를 놓지 않고 군 복무를 해결했다. 2012년 팀에 돌아왔고, 전동수라는 이름을 현 이름으로 바꾸면서 마음도 새롭게 고쳐잡았다.

 

부상이 문제였다. 경찰청 시절 외야에서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가 어깨가 돌아가면서 관절와순이 찢어졌다. 그는 “수술 성공률이 낮다는 말에 어떻게든 재활로 해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사실 당시 경찰청 그라운드 잔디가 썩 좋지 않았다. 경기 도중 본능적으로 슬라이딩 수비는 나오고 하니 찢어진 부위가 더 벌어지며 탈구까지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결국 몇 번의 수술과 긴 재활만 거듭하다가 첫 방출을 맞았다. 고작 25살 때의 이야기였다.

 

프로야구 NC 전민수 코치가 본지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사진 촬영하고 있다. 사진=김두홍 기자 kimdh@sportsworldi.com

 

◆시련을 발판 삼아

 

변곡점이 돼줬다. 그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정말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했는지, 내게 놓인  환경에 대해 핑계만 대진 않았는지 돌아봤다. 변함없이 뒷바라지 해주고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의 간절한 응원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현실은 차가웠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 그를 막아섰다. 그때 한 동갑내기 선수가 자극제가 돼줬다. 전 코치는 “강진에 있을 때 한 선수가 히어로즈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온 적이 있다. 모든 걸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당시는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는 세상을 향한 비관적인 시선이 강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선수가 밤낮없이 노력하더니 결국 해내더라. 그 친구가 바로 서건창이었다”고 그 주인공을 공개했다.

 

이어 “팀에서 군 복무를 위해 경찰 야구단을 보낼 정도의 유망주였던 저는 방출됐지만, 신고 선수로 시작한 서건창은 운을 실력으로 잡아내더니 2014년 200안타를 때려냈다. 너무 신기했고, ‘나는 대체 뭘 했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놨다. 

 

프로야구 NC 전민수 코치가 답변하고 있다. 사진=김두홍 기자 kimdh@sportsworldi.com

 

‘겸손’을 다짐하며 성숙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때다. 사회인 야구 레슨, 어린이 야구 교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재활과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그런 그에게 마치 ‘서건창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신생팀 KT가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약 11개월 만에 다시 바라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소원이 하나 있었다. 그는 “다시 야구를 한다면 그만둘 때 두더라도 ‘전민수’ 이름 검색하면 안타 치는 영상 하나만 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1~2군을 오가는 위치다 보니 기회도 많이 없었다. 아침에 1군 등록됐다고 가족들에게 자랑했다가 저녁에 말소되는 날도 있었다”며 “그렇게 남은 20타수 무안타는 마음 속의 응어리였다. KT로 향하면서 ‘안타 1개’를 목표로 했던 이유다”고 고백했다.

 

2015년 퓨처스에서 0.395의 고타율을 남기며 재기에 성공한 그는 기어코 1군 데뷔 안타를 쳤다. 2016년 4월22일, 대구 삼성전에서 데뷔 9년 만의 안타를 때려냈다. 그는 “안타 치고 나서 유한준 선배가 ‘이 안타가 10개가 되고 100개, 200개가 될 거다. 열심히 해라’라고 해주시더라. 그런 조언들 덕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딱 맞는 옷을 입고

 

행복은 썩 길지 않았다. 꿈 같았던 2016시즌을 뒤로 하고 또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기량도 떨어지며 결국 방출됐다. 2018년 말 LG로 향했지만 또 방출 엔딩이 그를 기다렸다. 3번의 아픔으로 포기를 선언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성실함’이라는 무기 하나로 NC에서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쏠쏠한 좌타 대타 자원으로 활약했고, 잔뼈가 굵은 ‘형님’으로서 팀원들을 이끌었다. 최고의 해였던 2016년 같은 시즌은 다시 만들지 못했지만, 동료들과 코칭스태프로부터 훌륭한 팀원으로 인정받은 끝에 이례적인 2군 무대에서의 은퇴식을 끝으로 지난해 5월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NC 전민수 코치(왼쪽)의 퓨처스 은퇴경기 당시 기념사진. 사진=NC다이노스 퓨처스 팀 제공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제2막으로 염두에 두고 있던 그는 지난해 마무리 캠프부터 코치로 합류했다. 그의 인성과 따뜻한 리더십을 높게 본 NC 강인권 감독이 그를 불러들였다. 올해 1군에서 송지만 타격 코치를 돕는 타격 보조 코치로 동고동락했다.

전 코치는 “후배들과 소통하는 모습이나 타격에 대한 저만의 관점들, 경기 준비하는 모습 등을 팀에서 높게 사주신 것 같다”며 자세를 낮췄지만, 사실 준비된 자원이었다. 그는 “과거부터 생각이 없지 않았다. 선수 생활 말미부터 남는 시간에 스포츠 경영·심리학 등 학업을 병행했다. 공부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전문성이 있어야 선수들이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탁월한 준비 덕이었을까. 그에게 코치는 천직이었다. 그는 “여전히 코치로도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정말 어렵다. 맡은 보직이 타격이니 그쪽 공부에 집중했었는데, 직접 생활하다 보니 철학적인 부분들에 대한 공부도 정말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선수와의 커뮤니케이션, 코칭 피드백, 심리 상담 등 관리자로서 필요한 부분도 더 공부하게 됐다”고 전했다.

 

1989년생의 젊은 코치이자, 지난해까지 함께 선수였던 형님이라는 점이 큰 도움이긴 하다. 하지만 과거와 똑같을 순 없다. 그는 “어쨌든 신분이 코치로 전환되지 않았나. 보이지 않는 결계, 벽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다. 이전보다 나를 어려워하는 게 당연하다”며 “그 벽을 허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유대 관계가 형성되고, 내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자신의 속마음까지 꺼내 보여줄 때가 정말 고맙고 보람된 순간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NC 송지만 타격코치(왼쪽)와 전민수 타격 보조코치의 모습. 사진=NC다이노스 제공

 

그 노력이 모두 값진 결과물로 나타났다. NC는 올해 차가웠던 평가를 보란 듯이 뒤엎고 가을야구까지 진출해 플레이오프까지 닿는 돌풍을 보여줬다. 전 코치는 “코치 첫해가 정말 다이나믹했다. 운 좋게 1군에서 시작해 이제껏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했다. 선수들이 나날이 성장해 가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엄지를 세웠다. 이제 막 코치로서 첫 발걸음을 뗀 그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코치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사실 코치는 선수들의 긴 커리어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친구들이 자기 뜻을 펼치는 데 방해만 되지 말자고 항상 다짐한다. 멘탈적으로 건강하게 야구할 수 있게 해주고 싶고, 막히는 게 있으면 신뢰감과 전문성으로 채워주고 싶다. 물론 어렵고 스트레스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몰입해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한 스트레스지 않나 싶다. 항상 낮은 자세로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하는 지도자가 되겠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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