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스포츠] ‘선출 심리지도자’ KT 안영명이 걷는 전인미답의 길

KT 안영명 멘탈 코디네이터가 본지와의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사진=KT위즈 제공

 

“티가 나지 않지만, 꼭 해야 할 일입니다.”

 

프로야구에서 무려 20년, 18시즌을 누볐다. 한화, KIA, KT를 거치며 마운드를 밟아온 안영명(39)은 현역 마지막을 장식한 KT에서 멘탈 코디네이터로 제2의 인생을 맞았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길이지만 그는 아무도 던지지 않았던 공을 뿌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업(業)에 전력을 다한다.

 

◆마침표가 쉼표로 변한 마법

 

2022년 5월 14일, 수원 키움전이었다. 직전 시즌 KT의 창단 첫 통합우승을 함께한 베테랑 유한준이 친정팀 앞에서 눈물의 은퇴식을 가졌다.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던 투수조 맏형 안영명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굴곡진 선수 생활을 보내온 그가 생전 느끼지 않던 한계를 느끼던 찰나, 선배의 뜨거운 마지막이 그의 마음도 동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은퇴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한준 선배를 보면서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유난히 화려해서 그랬을까. 눈물이 나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머지않아 2군행을 통보받았다. 은퇴를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는 “분한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이강철 감독님께 가서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감독님도 별말씀 없이 ‘그래, 고생했다’고 하시더라”며 마지막을 떠올렸다.

 

2012년 찾아온 상완신경총(목에서 팔까지 이어지는 신경들의 집합체) 손상으로 인해 신경을 누르던 근육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그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지만, 근육이 붙지 않던 안영명의 오른팔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이강철 감독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경련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작별을 고하는 제자에게 묵묵히 악수를 건넨 이유다.

 

KT 안영명이 2022년 8월 자신의 공식 은퇴식에서 은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KT위즈 제공

 

사령탑은 늦지 않은 시점에 안영명에게 당시 공석이던 재활군 코치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꼭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영명은 “2013년 공익 근무 시절 지인의 권유로 스포츠심리학을 배우게 됐다. 정말 재밌었다. 어렸을 때 하지 못한 ‘공부’ 자체에 대한 갈망도 있었다. 은퇴 후에 그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고, 인사를 돌린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KT 나도현 단장에게 “은퇴식을 열어주겠다”는 전화가 왔다. 바로 차 머리를 돌렸다. “그럴만한 선수가 아닌데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러 돌아온 그에게 나 단장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스포츠 심리 상담을 하고 싶다”는 대답에 나 단장은 “그럼 그걸 하면 되겠네”라는 간단한 해결법을 제시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안영명이 KT에서 보여준 인품과 쌓아온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그해 8월5일 은퇴식에서 찍어진 ‘선수’ 안영명의 마침표는 ‘KT 멘탈 코디네이터’ 안영명의 쉼표로 금세 탈바꿈할 수 있었다.

 

◆‘멘탈’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심리 상담 트레이너, 멘탈 케어 코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그의 보직이다. 하지만 여전히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다. 그는 “공식적인 코치는 아니다. ‘멘탈 코디네이터’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겠다”며 자신의 업무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2군 익산 구장과 1군 수원 구장을 계속 오간다. 그러면서 선수들과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경기에 대한 리뷰도 한다. 물론 코치님들이 계시니 기술적인 얘기는 하지 않는다. 경기 외적인 얘기들까지 편하게 나누는 느낌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무래도 2군 선수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1군 선수들은 직접 요청이 있기 전에 먼저 나서지 않는다. 1군 선수들이라면 각자 루틴이 있지 않나. 그걸 모두 지켜줘야 한다”고 전했다.

 

가장 많이 듣는 고충은 1~2군을 오가는 선수들이 내놓는 ‘불안정성’에 대한 것이다. 그는 “선수라면 모두 사이클이 있다. 그 속에서 퓨처스를 오가는 선수들은 조바심을 내곤 한다. 대부분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며 “다 내가 경험했던 것들이다. 그 기억을 살려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선한 동기부여를 끌어 내는 게 내 역할이다”고 말했다.

 

KT 안영명 멘탈 코디네이터가 본지와의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사진=KT위즈 제공

 

부상 선수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 크고 작은 부상을 겪어봤기에 이 또한 전문 분야다. 그는 “예기치 않은 부상은 엎질러진 물과 같다.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본인을 힘들게 할 뿐이다”며 “꼭 필요할 때 한 템포 쉬라고 하늘이 내려준 휴식기라 말해준다. 재활에 욕심을 부리다 보면 부상은 재발하기 마련이다. 역시 선수들의 조바심을 컨트롤하는 게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일반인이었다가 ‘공인’으로 살게 되는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SNS를 통한 활발한 소통이 당연한 세상이 됐지만, 그 안에서 생기는 부작용들이 그의 당면 과제다. 그는 “돈을 받는 프로기 때문에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도를 넘는 비난과 질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는 선수들에게 최대한 근처에 가지 말라고 한다. 때로는 경주마처럼 당장 눈앞에 있는 야구만 보라고 조언해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때 특히 필요한 건 ‘낙천성’이다. 그는 “시간이 약이다. 그런데 타고난 낙천성이 있는 선수들은 그 시간이 줄어드는 법이다. 한화 시절 김태균 선배가 그랬다. 4삼진 먹은 날이었는데, 하이라이트 방송을 보고서야 ‘나 4K 먹었어?’라더라”며 재밌는 에피소드를 꺼냈다. 그는 “(김태균) 선배는 ‘나 때문에 지는 날도 있지만, 나 때문에 이기는 경기도 있는 법이다. 그걸 생각하는 게 우선’이라는 마인드다. 그런 낙천적인 선수들이 롱런한다. 그걸 우리 선수들에게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해야 하기에

 

절대 쉽지 않은 업무지만 즐겁게, 그리고 잘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다. 모두 그가 겪어봤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익 시절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건, 경기 도중 느낀 모든 감정이 책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걸 학문으로 배운 덕에 소집해제 후, 마운드에서 감정 컨트롤이 수월해지더라. 경기력에 분명한 도움이 됐다”며 “그 기분을 후배들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고 웃었다.

 

물론 힘든 순간들은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케어를 받던 선수의 위치에서 누군가를 케어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혼자서 모든 선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수많은 고민들을 듣고 공감하고 피드백을 주는 일이 감정적으로 굉장히 힘들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이제는 요령이 많이 붙었다. 그는 “달리기나 마라톤, 인라인스케이트나 골프, 낚시 등 활동적인 것들을 취미로 삼아 이겨내고 있다. 선수 때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기지 않았나”라며 미소 지었다.

 

KT 안영명 멘탈 코디네이터가 본지와의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사진=KT위즈 제공

 

구단의 특별 배려도 날개를 달아준다. 그는 “KT에 정말 감사한 게 하나 있다. 심리상담에서 가장 첫 번째로 배운 게 비밀 보장이라는 상담 윤리다. 이게 안 지켜지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기 약점과 속마음이 그대로 구단에 밝혀지는 꼴밖에 안 된다. 구단에서도 이 점을 공감해 줬다. 그 때문에 선수의 생명에 지장이 가는 수준의 심각한 문제만 아니라면 일일이 보고를 받지 않는다”며 “그게 잘 지켜지니 선수들도 비밀 보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저와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지 않나 싶다”고 엄지를 세웠다.

 

선순환 속에서 더 큰 꿈을 꾸려 한다. 그는 “사실 우리나라 심리 상담, 특히 스포츠 심리 상담은 더 갈 길이 멀다. 그 점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며 “어떤 분들은 지금 내 역할이 특정 구단만이 아닌 KBO에 소속된 모든 선수들에게 필요한 일이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중요한 업무인 게 맞다. 결과가 바로 티가 나는 일은 아니지만, 선수 그리고 팀을 위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특히 선수 출신으로서 심리 상담과 구단-선수단 사이 가교 역할을 하는 보직이 꼭 팀마다 있었으면 좋겠다. 그 대표주자로서 좋은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 지금도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나로 인해 많은 분이 이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다”며 밝게 미소 지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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