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하게 이어지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K팝 산업은 계속 신인들을 론칭시키고 있다. 이 혼란스러운 2020년 상반기, 아슬아슬하게 데뷔한 팀 중 그나마 깊은 인상을 남긴 팀을 꼽아보자면, 역시 지난달 19일 데뷔한 걸그룹 시크릿넘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미 언론을 통해 소개도 많이 됐다. “인도네시아 출신 멤버가 소속된 최초의 K팝 그룹인 덕택에 인도네시아에서 난리 나 유튜브 대박 난 팀.” 딱히 틀린 내용도 아니다. 화제의 멤버 디타가 ‘최초의 인도네시아 출신 K팝 아이돌’은 아니란 점만 빼곤 말이다. 최초는 2017년 데뷔해 지난해 해체한 보이그룹 14U 멤버 로우디였고, 디타는 K팝 ‘걸그룹’으로서 첫 번째다. 스스로 K팝이 아닌 Z팝이라 명명한 Z-걸즈를 제외하고 보면 그렇다.
어쨌든 ‘디타 효과’는 확실히 대단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획사 그룹임에도 데뷔곡 ‘Who Dis?’ 뮤직비디오는 공개 3일 차 500만 뷰를 넘어서고, 10일 차엔 1000만 뷰도 돌파했다. 7일 오전까진 1270만 뷰를 돌파한 상태다. 웬만큼 이름 있는 기획사 신인그룹보다도 속도가 빠르다. 그 덕에 유튜브 점수가 가산되는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도 5월 마지막 주 6위, 6월 첫째 주에도 7위 랭크되는 쾌거를 거뒀다. 이 정도면 최소 2020년 상반기 데뷔 걸그룹 중에선 가장 뛰어난 성과가 맞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사실 시크릿넘버 데뷔 보도자료 배포 시점인 5월 6일까지만 해도 소속사 측에선 지금 상황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도자료엔 다양한 언어구사가 가능한 글로벌 그룹이란 대목만 존재하지, 멤버 한 명 한 명 국적을 언급하며 설명해놓진 않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K팝 팬들 사이에선 상황이 달랐다.
디타는 이미 데뷔 전부터도 인스타그램 상에서 인도네시아 K팝 팬들에 나름 주목받던 존재였다. 동경하던 K팝 아이돌 연습생이란 점 하나만으로도 그럴 만했다. 올해 들어선 인스타그램 라이브도 활발히 진행,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한국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K팝 팬들과 소통했다. 가끔 다른 멤버들도 등장해 어설프게나마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하려는 모습이 호감을 사기도 했다. 기대감은 데뷔 수개월 전부터 점차 고조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디타와 앞선 14U 멤버 로우디 차이도 존재했다. 먼저, 아무래도 대중성 차원에선 남돌보다 여돌 쪽 확장성이 크다는 세계 공통 코드가 존재한다. 그리고 로우디 국적은 인도네시아가 맞지만, 인도네시아 화교와 한국인 혼혈로 어디까지나 동북아시아계 외모였다. 소위 ‘인종적 동질성’ 차원에서 그렇게까지 와 닿는 멤버는 또 아니었던 셈이다. 각각 자바족과 발리족 부모를 둔 디타에 대한 감정은 당연히 그보다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5월 6일 공식데뷔 보도자료가 나가면서부터 모든 잠재요소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인도네시아 K팝 팬들 최대 화젯거리가 되고, 현지 방송들도 잇따라 보도에 나섰다. 반향을 감지하자 소속사 측에서도 전략을 수정했다. 19일 공개된 ‘Who Dis?’ 뮤직비디오 유튜브 썸네일은 포지션상 센터도 메인보컬도 아닌 디타로 설정됐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그럼 ‘디타 효과’는 과연 K팝 산업 전체에 충격을 줄 만한 전환점이 맞을까. 전체 산업 기조 측면에서 그 방향을 선회시킬 만한 계기가 과연 맞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보긴 힘들다. 물론 인도네시아는 K팝 산업 입장에서도 주목할 조건이 많은 나라다. 그러나 아무리 성장세 가파른 시장이라 해도 아직 개발도상국으로서 한계는 뚜렷하다. 인도네시아 1인당 GDP는 2019년 기준 4193달러다. 한국의 1/7이 채 안 된다. 인구가 워낙 많아 중산층도 한국 인구보다 많은 5200만 명 규모라지만, 인도네시아 중산층을 한국의 그것과 혼동해선 안 된다. 인도네시아 중산층 기준은 하루 수입 15달러 이상 계층을 가리킨다. 소득계층을 6개 구간으로 나눈 자료에서도 최상위 ‘엘리트’층 월 소득 기준은 한화로 약 64만 원 이상 정도였다.
그러니 한국서 나오는 CD 등 각종 굿즈를 소비해줄 여력은 부족하다 봐야 하고, 공연으로 큰 수익을 내기도 힘들다. 유튜브조차 해당 국가 광고단가 기준으로 수익이 결정되니 일본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봐주는 것보다 수익이 크게 떨어진다. 지난해 인도네시아기업과 조인트 벤처를 설립한 SM엔터테인먼트 역시 근본적으론 현지 아티스트 발굴로 방향을 잡은 것도 그 탓이다. 현지 물가비용으로 현지 아티스트를 키워 내놓는 건 말이 되지만, 한국에 기반을 둔 K팝 산업 입장에서 인도네시아를 실질 수익처로 생각해보는 건 현시점 무리다.
그럼 시크릿넘버 같은 경우는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유튜브 조회수만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걸까. 그렇게 냉소적으로 볼 일은 또 못 된다. 어찌 됐건 시크릿넘버는 중소기획사 아이돌로서 가장 중요하다는 초기 론칭에 성공한 팀이 됐기 때문이다.
시크릿넘버는 데뷔 즉시 한국서도 무시 못 할 반향을 끌어냈다. 관련 기사들이 각 포털사이트에서 절대 ‘묻히지’ 않았다. 데뷔 쇼케이스에서 디타가 한 말 때문이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좀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난리가 났다. 가족들한테 들었는데 매일 기사도 나오고, SNS에서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
K팝 ‘국뽕’이 암만 흔해진 세상이라도 이런 얘기들은 여전히 한국 대중 흥미를 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출신 아이돌이란 또 흔치 않은 얘기다. 보도가치가 충분하고 전파력도 강하다. 일종의 언더독 드라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에 음반판매도 호조를 이뤘다. 초동으로 팔려나간 1300여장은 ‘기획사 팬덤’이 존재하지 않는 신인 걸그룹으로서 사뭇 주목할 만한 수치다. 언론홍보가 그만큼 잘 됐단 방증이다. 나아가 각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에서도 꽤 비중 있게 다뤄주고 있다. 미디어 소재로 가치가 높다 판단됐으니 가능한 일이다.
얼핏 10여 년 전 K팝 언론플레이 관행이 떠오르기도 하는 대목이다. 해외인기로 해외에서 수익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내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지렛대로 해외인기를 부풀려 언론플레이하던 시절. 여기서 시크릿넘버는 그 해외인기가 실제로 부풀려진 것도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그저 미디어가 늘 선호하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려줬을 뿐이다. 골자는 옛 전략 그대로지만, 이를 보다 클린하게 되새김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디타 효과’는 딱 데뷔 론칭까지만 써먹을 수 있는 일회성 카드였단 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본래 팀 특색을 홍보해줄 도구는 론칭이 끝나면 더 쓸 일이 없다. 이후부턴 중소기획사 걸그룹 정석대로, 일단 퀄리티 높은 노래와 멤버들 개성을 알리기 위한 자체콘텐츠에 투자가 필요하다. 상당히 멀고 험한 길이다. 어쨌든 일단 지금은 시크릿넘버가 데뷔 론칭에 성공한 ‘지극히 운 좋은 소수’에 들어갔단 점만 기억해두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격동의 2020년 상반기 K팝계 기억에 남을 흐뭇한 사례다, 그리고 지극히 흥미롭기도 하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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