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의 참패…韓 영화, 대안은 ‘서브장르’ [이문원의 쇼비즈워치]

‘UBD’란 신조어 놀이가 화제다. 인터넷 커뮤니티발로 시작, 벌써 몇 차례 언론기사화까지 됐다. UBD는 ‘엄복동’의 영어 이니셜이다. 바로 지난 2월 개봉해 흥행 참패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관객 수 17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흥행단위 놀이다. 170만 관객이 들면 10UBD라 표현한단 식이다.

 

지독한 조롱이다. 그런 탓에 약자를 조롱하는 왕따 행각 같다며 사용치 말잔 분위기도 돈다. 그래도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애초 이런 놀이 자체가 단순히 흥행 참패를 놀리기 위해서만 시작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근래 제작비 100억 원 이상 투입된 초대형 블록버스터들 중 저급한 기획력과 열악한 완성도로 흥행 참패하는 사례가 점점 느는 추세다. 2년 전 ‘리얼’을 기점으로 지난해 ‘염력’ ‘7년의 밤’ ‘인랑’ 등 초대형 블록버스터들이 불과 100만 관객도 넘기지 못한 채 쓰러졌고, 올해도 ‘뺑반’이 손익분기를 넘지 못하며 한 해가 시작됐다. 그러다 ‘자전차왕 엄복동’까지 왔다. 결국 ‘UBD 놀이’는 애초 될 성 싶지도 않은 영화에 막대한 돈을 퍼붓는 근래 한국영화산업의 어이없는 ‘헛발질’을 비웃는 놀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블록버스터 참패’ 관련 이슈들이 터질 때마다 늘 함께 따라붙는 ‘대안’ 이슈가 있다. 이른바 ‘작은 영화 살리기’다. 굳이 독립영화 수준까진 아니라도, 어찌됐건 50억 원 이하 제작비로 만들어지는 중급 상업영화들이 ‘허리’를 받쳐줘야 한단 주장이다. 그래야 블록버스터 참패 사례가 등장해도 시장과 투자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블록버스터 도미노 붕괴가 일어나던 지난 한 해 동안에도 그 대안으로 ‘리틀 포레스트’ ‘곤지암’ ‘완벽한 타인’ 등 중급영화 성공사례가 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소개돼왔다. 이제 ‘자전차왕 엄복동’까지 간 마당이라면 너도나도 이 개념으로 초점을 맞추고들 있을 터다.

 

그런데 여기서 짐짓 의문 가는 지점이 있다. 어느 영화시장에서나 중급영화는 대개 뚜렷한 장르영화, 거기서 더 세분화된 서브장르 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다. 뚜렷한 경향성으로 확실한 팬층만 모아 승부한단 자세다. 그렇게 한국서도 여러 서브장르들이 시도되고 있지만, 사회문화 환경과 맞물려 이상스레 생략되고 있는 서브장르가 있다. 이른바 ‘반려동물영화’다.

반려동물 문화가 일정수준 이상 자리 잡은 문화권에서 이 반려동물영화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가장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온 서브장르라 볼 수 있다. 그 기원이 1940~50년대 정도까지 내려가는 미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주로 애견 중심으로 서브장르가 짜여 있으며, 1970년대에 이미 벤지나 래시 같은 프랜차이즈를 탄생시킨 바 있다. 이후로도 흐름이 끊긴 일이 없다. ‘터너와 후치’ ‘늑대개’ ‘머나먼 여정’ ‘베토벤’ ‘비버리힐즈 치와와’ ‘강아지 호텔’ ‘스노우 독스’ ‘말리와 나’ ‘베일리 어게인’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박 이상을 기록하며 적은 제작비로 짭짤한 수익을 안겨줬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역대흥행 10위 안에 들어가는 1983년 작 ‘남극이야기’부터가 반려동물영화다. 미국과 다른 점이라면, 애묘국가답게 애묘 영화들도 함께 인기를 끌고 있단 점이다. ‘구구는 고양이다’ 류 일상드라마부터 ‘고양이 사무라이’ 같은 판타지 코미디까지 끝도 없다. 심지어 2016년 작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애묘인들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 제목으로 눈길을 끌어 12억3000만 엔을 벌어들이는 쾌거를 거뒀다. 역시 적은 제작비로 늘 ‘어느 정도’는 해주는 효자 장르이기에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국도 현 시점 반려동물영화가 등장할 환경은 된다. 지난해 10월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반려 고양이 수는 154만2000마리로 2012년보다 3배 이상 늘었다. 반려견도 같은 기간 325만1000마리에서 398만7000마리로 확실히 늘어난 상태다. 각각 연평균 증가율 25.4%, 4.2%다. 덕택에 펫푸드 및 펫용품 시장규모도 급성장 중이다. 1인가구가 늘면서 반려동물을 원하는 젊은 층 역시 함께 늘어난 결과다. 이를 방증하듯 젊은 층 이용률이 높은 페이스북 등 SNS는 이미 반려동물들 전시장화 된 지 오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같은 반려동물 관련시장 확대 분위기에서 오직 영화만 재미를 못 보고 있는 셈이다. 해당 서브장르 영화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아무리 외국서 잘 되는 서브장르라도 한국 사정은 다를 수 있단 우려라면, 사실상 이미 성공사례도 존재한다. 2006년 공개된 애견영화 ‘마음이...’다. 당시 81만7939명 관객을 끌어들이며 손익분기를 돌파, 4년 뒤 속편까지 등장시킨 바 있다. 속편 역시 69만6382명을 동원하며 선방했다.

 

그런데 그 후속이 없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010년대 들어 꾸준히 중급영화에 대한 관심은 줄고 ‘택시운전사’ ‘1987’ 등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까지도 모두 블록버스터 급 제작규모로 재편되는 상황이 벌어진 정황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충분히 쏠쏠한 장사가 될 수 있는 데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블록버스터 도박판 대세 속에 더 개발되지 못하고 버려진 서브장르일 수 있단 얘기다. 다시 살려내 볼만한 충분한 포텐셜이 존재한다.

 

물론 이밖에도 될성부른 중급 서브장르는 많다. 예컨대 종교영화가 있다. 미국선 독립제작사 셔우드 픽쳐스가 초저예산 기독교영화들로 중박신화를 이어간 후 서브장르 자체가 메인스트림화 됐다. 이젠 ‘천국에 다녀온 소년’ ‘아이 캔 온리 이매진’ 등 메이저 스튜디오들에서도 하나둘 시도해 북미흥행 8000만~1억 달러까지 기록하는 효자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한국서도 기독교 부흥기였던 1980년대 개신교 자본으로 몇 차례 시도된 적 있지만 열악한 완성도 탓에 시장 퇴출되고 만 전력이 있다. 셔우드 픽쳐스처럼 보다 섬세한 접근과 홍보 전략을 동원한다면 일요일 예배 마친 신도들을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다.

 

한편 장르 관계없이 연출기법으로 중급영화 영역을 넓혀볼 수도 있다. ‘곤지암’이 시도했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콘셉트, 즉 극중 인물들이 캠코더로 상황을 찍고 그 화면을 영화화면으로 대체한단 콘셉트 말이다. 이 역시도 미국선 공포뿐 아니라 난장판 코미디(프로젝트 X), SF 액션(크로니클), 괴수 스릴러(클로버필드) 등 전 방위 장르에 적용되고 있다. 촬영기법 특성상 어느 장르에서건 제작비를 크게 줄일 수 있어 ‘비싼 장르를 싸게 찍을 수 있는’ 대표적 방법론으로 애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역시 응용해볼 만하다.

 

어찌됐건 100억 원 이상 거대제작비를 들인 초대형 블록버스터와 탄탄한 팬층을 지닌 중급 서브장르 영화들은 늘 서로 공존하며 시장을 지탱해가야 한다는 게 영화산업 성립의 기본 중 기본이다. 도박성 농후한 블록버스터 부담을 감당해내려면 탄탄한 수요층을 갖춘 보다 작은 영화들 뒷받침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은 중급영화들 생존기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아이디어’다. 장르해석에 대한 아이디어, 연출기법에 대한 아이디어, 수요층 감지에 대한 아이디어, 끝도 없다.

 

이제 겨우 4월인데 벌써 100억 영화 두 편이 쓰러졌다. 여름 성수기가 오면 더 많은 100억 영화들이 몰려온다. 중급영화 소화방안은 지금 바로 고민해봐야 할 과제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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