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적인 예가 김정남을 독살한 ‘VX’, 즉 ‘독성물질 엑스(Venomous agent X)’이다. 1950년대 영국의 화학자가 살충제로 특허 출원했다가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용도 폐기됐다. 그러나 냉전시절에 끝내 화학전 무기로 개발됐다. VX는 순식간에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킨다. VX의 화학구조를 보면, 그야말로 독성물질의 집합체이다. 여러 독성물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질소, 황, 인, 메틸 등의 분자들이 동시에 들어있다. VX의 독성은 사린가스의 100배에 달한다.
VX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멈추게 하는 효소를 억제한다. 이로써 아세틸콜린은 계속 신경신호를 전달하게 되고 근육들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결국 숨통 근육 마비로 질식을 유발한다. 식물에 들어 있는 니코틴도 아세틸콜린의 수용체에 작용해 살충효과를 낸다. 자연에는 이처럼 인간에게도 치명적인 물질을 만들어내는 식물이나 박테리아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물질을 만들어내는 식물이 단숨에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만큼 독성물질을 농축해 두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식물 입장에서 고등동물을 순식간에 처치할 만큼 특정 화학물질을 농축해두는 것은 소모적이고, 사실 그럴 능력도 없다.
결국 문제는 이들 물질을 농축해 독극물로 사용하는 인간이다. 많은 동물들이 식물의 독성물질을 적절한 농도로 섭취하며 자신의 건강을 관리한다. 사자는 가끔 풀을 뜯어 먹는다. 기생충에 감염됐거나 박테리아 또는 바이러스로 인한 염증을 겪을 때 식물에 들어 있는 탄닌, 솔라닌 등 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를 소량 섭취해 자가치료를 하려는 것이다. 코끼리는 식물과 함께 섭취될 수 밖에 없는 폴리페놀, 알칼로이드 등의 독성물질을 해독하거나 배출하기 위해 동굴이나 바위에 있는 유화나트륨을 섭취한다.
식물이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어시스템은 다양하다. 장미와 선인장, 오가피나무의 가시도 방어 기작의 하나이다. 고추는 알칼로이드의 일종인 캡사이신으로 매운 자극을 발산하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가려움과 염증을 유발하는 옻나무의 화학물질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벌레뿐 아니라 땅속에 스며들어 경쟁하는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나 식물이 내는 독성물질은 인위적으로 농축시키지 않는 한 인간에게 치명적이지 않다. 오히려 식물의 독은 적절한 농도에서는 인간의 건강에 유익하다. 그래서 ‘진하면 독, 연하면 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커피가 몸에 유익하다는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면, 그 성분들은 대부분 커피나무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화학물질들이다. 커피나무의 방어기작 역시 다양하다. 잎과 열매 표면에는 왁스층은 수막을 형성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곰팡이 포자가 발아하거나 세균이 증식할 수 없도록 한다. 화학물질로는 폴리페놀이 식물들에게 보편적인 방어무기다. 폴리페놀은 식물이 광합성과정에서 당분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2차 산물이다. 커피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폴리페놀이 클로로겐산인데, 활성산소를 제거함으로써 인체의 노화를 방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커피나무에게는 쓴맛과 떫은맛을 유발함으로써 초식동물의 공격을 물리치게 해준다. 클로로겐산 등의 폴리페놀은 또 벌레나 곤충의 소화기관에서 침전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치명상을 안긴다. 카페인 역시 다른 식물이 주변에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쓴맛과 자극으로 살충-살균 효과를 낸다. 역시 농축해 주입하면 치명적이지만, 하루 섭취량을 지키면 암과 치매를 고치는 성분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약인지, 독인지를 두고 자연을 탓할 일이 아니다. 인간의 악의와 욕심이 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플레이버마스터
사진설명
커피나무는 꽃에도 미량의 카페인을 품게 한다. 벌로 하여금 자신을 잘 기억하고, 단맛을 더 많이 느끼도록 만들어 자주 찾아오게 하는 장치로 카페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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