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무시간에도 전화가 수시로 울렸다. ‘엄마 8절지 사와’ ‘퇴근할 때 감자칩 풍선껌’ ‘졸려 삼십 분 후에 깨워줘’ ‘밥 차려줄 때까지 굶을게’…… 내가 집에라도 있는 듯 부려 먹었다. 아침 7시에 준비물 사러 문방구로 출동하거나, 밤 11시에 감기약 사러 동네 약국을 뒤지는 일이 허다했다. 전화해서 둘이 치고 박고 생중계로 싸우기도 했다. “엄마 얘 죽여도 돼? 오늘 죽여 버릴 거야.”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살벌한 설전은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하였다. 난 ‘아그들’이란 이름으로 걸려오는 숱한 전화가 민망하여 ‘지베서’에서 다시 ‘지부장’으로 바꿔가며 직장에서 부산한 어미의 삶을 감추고 살았다.
애들은 슬슬 엄마의 빈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없으니 마음껏 퍼져 살았다. 주말에만 하기로 한 게임이 평일로 슬그머니 옮겨왔고, 뱃속에서부터 공들인 책 읽는 습관이 출근 3개월 만에 흐트러졌다. 방문은 안으로 자주 잠겼고 터럭처럼 비밀들이 자라났다. 문턱을 밟을라치면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싸늘한 선긋기를 해왔다. 한 집의 비좁은 양수에서 비릿한 이물감을 견디지 못해 오해가 튼 살처럼 벌어졌다. ‘아, 몸 안에 몸을 잉태한 듯, 몸 밖의 자식도 이렇게 비린 거구나. 출산이란 없는 거구나.’ 직장에 나가 있든 마트에서 장을 보든 내 몸에 가위로 자를 수 없는 탯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절묘한 타이밍이라 여겨졌다. 사춘기란 어차피 부모로부터 갈라져 나와 독립의 근육을 키워야 할 때가 아닌가. 직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긴 ‘무관심의 거리’가 고마웠다. 슈퍼우먼이 되려 하지 말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애들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챙기며 의젓한 독립을 완성해갈 것이다. 탯줄을 부여잡아봤자 눈먼 잔소리와 오해의 튼 살만 늘어날 뿐이다. 이제 난 십오 년의 질긴 탯줄을 자르고 무거운 몸을 풀러 바람의 산파를 찾아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부모의 빈자리로부터 성장해왔다. 열 살에 돌아가신 엄마가 무덤 속에서 날 길러주신다 여긴 적 있다. ‘엄마가 보고 있어’ 난 비뚤어지고 나약해지는 마음을 유령 같은 엄마의 온기에 기대어 살았다. 첫 아이 출산하러갈 때에도 내 떨리는 손을 잡아준 건 남편이 아닌 세상에 없는 엄마였다. 남편도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젖은 눈길에 의지해 제법 의젓한 가장의 위용을 갖추지 않았는가. 심약한 울보아버지 밑에서 잎잎이 우람한 나무아이가 자라고, 싱글맘 아래에서 빈자리 어둠을 밝혀줄 등불아이가 자라난다. 부모는 돌아가신 후에도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부재의 힘으로도 성장해가는 것이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이들 독립의 절묘한 타이밍을 손 안에 넣었으니 사고뭉치 남편의 성은(聖恩)이 하해와 같다 할 것이다. ‘첩첩난관에서 만사형통의 수순으로’ 인생의 손바닥이 뒤집히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김라라 / 식품기업 R사 마케팅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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