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황제마 탄생을 위한, 시정마의 역할

[정정욱 기자]

경마산업에 있어 씨수말들은 훌륭한 경주마들을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스톰캣’처럼 유명 씨수말들은 특급 대우를 받으며, 1000억 원을 호가하는 몸값을 자랑한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씨수마는 ‘메니피’로 교배료만 700만 원에 달한다. 1년 간 교배두수도 최대 100여 두에 육박해 벌어들이는 수익도 엄청나다.

발정기가 되면 암말은 성격이 포악해져, 마음에 들지 않는 수말에게 곧잘 뒷발질을 해 씨수말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해결사 역할을 하는 말이 바로 시정마다. 사전적 의미는 ‘교미 때 암말에게 혈통 좋은 수말이 채이지 않도록 암말의 기분만 떠보는 말’로 정의돼 있다. 쉽게 말하면 암말이 씨수말과 원활히 합방할 수 있도록 애무를 통해 마음을 녹이는 역할을 하는 말이다.

프로 시정마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특기로 흥분한 상태의 암말을 진정시킨다. 암말의 뒷발 공격을 피하며 엉덩이를 비롯해 신체 곳곳을 애무하기도 하고, 오히려 신체 일부를 공격하며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이들은 1년 동안 평균 400∼500번의 시정을 담당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암말에게 애무만하고 중요한 순간에 씨수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불운한 수말이기에 받는 스트레스 또한 어마어마하다. 일부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또 일부는 자신이 씨수말인줄 알고 달려들었다 뒷발에 차여 시정마로서 장기간 활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국마사회 렛츠런팜 장수에는 17년 간 혹독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기 시정마가 있다. ‘판우드세시’가 그 주인공으로, 당초 경주마로의 화려한 데뷔를 꿈꿨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덩치로 인해 시정마가 된 비운의 말이기도 하다. 발정기에 포악해진 암말의 격렬한 뒷발질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는 다른 시정마와 달리 ‘판우드세시’는 오히려 더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몇 분이고 적극적인 구애활동을 펼치며 결국에는 암말의 승낙을 받아낸다.

오랜 경력만큼이나 나이도 적지 않다. 무려 21살로서 사람으로 치면 60이 훌쩍 넘은 나이다. 그럼에도 ‘판우드세시’는 교배기가 되면 하루 최대 30∼40회의 시정 활동을 담당할 정도로 노련함을 뽐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눈물겨운 구애활동의 결말은 늘 씨수말에게 자리를 내주는 식의 씁쓸한 새드앤딩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한국마사회 렛츠런팜 장수에서 씨수말 관리와 교배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김만진 과장은 “스트레스와 위험성 때문에 좋은 시정마를 구하는 것 또한 좋은 경주마를 구하는 것 못지 않게 어렵다”며 “암말에게 겁먹지 않고 적극적으로 구애할 수 있는 강인한 성격과 체력이 없다면 절대로 시정마가 될 수 없다”고 했다. jjay@sportsworldi.com

판우드세시.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