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규 나바조스포츠 회장 |
족구화를 만들게 된 동기=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생활 방식이 바뀌던 1974년 약값을 보태기 위해 뛰어든 길이 신발 제조업이었다. 전공과는 무관한 일이 오늘날 나의 직업이 될 줄을 몰랐다. 당시 우리 나라의 신발 산업은 ‘나이키’가 한국에 처음 생산기지를 세웠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천’으로 만든 운동화에서 가죽으로 만든 운동화(혁화)로 큰 변화를 보였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만 했던 시기=운동화 발등 부분에 라테스를 소재로 하여 임팩트 때보다 더 멀리 보낼 수 있는 축구화에 아이디어를 특허 출원하여 2001년 7월에 등록했다. 하지만 미국에 특허 출원한 게 문제였다. 미국 특허청은 특허해 줄 수 없으니 이의가 있으면 미국 특허청에 재판을 청구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드시 미국 특허를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국 특허청과 재판을 시작하여 2004년 5월 승소하여 미국 특허에 등록했다. 이후 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자본금 5000만 원으로 2007년 2월 ‘㈜나바조스포츠’란 회사를 설립했다.
성장 가능성을 내다봤다=경성대 인큐베이터에서 2년을 지내고 마침 부산 사상구 감전동에 전국 장애인 기업 종합지원센터 부산지사가 문을 열게 되면서 그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 무렵 당시의 축구화로는 나이키, 아디다스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부산 신발산업 진흥센터 도움을 받아 족구화를 개발하게 됐고, 축구화의 특허기술을 접목한 시험용 족구화 1000컬레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많은 거래처를 확보했고, 나바조족구화는 지난 달 국민생활체육 전국대회 연합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족구 대회는 전국, 지역, 직장, 동호인 대회 등으로 나뉘어 공인구와 규격, 공인대회로 열린다. 족구는 나름대로 규정을 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 연합회에서 공식 족구화로 인정한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족구의 유례와 국민생활체육=우리 족구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이어진 가운데 옛 문헌에 우리 조상은 삼국시대부터 짚 따위나 마른 풀로 공을 만들어 중간에 벽을 쌓고 공을 차 넘기는 경기를 하였다. 이렇게 이어진 족구는 1970년대 들어 공군에서 시작으로 점차 군대에 보급되었고, 오늘과 같이 전국의 700만 족구인을 확보하게 됐다. 그리고 족구는 국민의 열기와 정부의 생활체육 활성화 방안에 힘입어 많은 동호인을 양성해내고, 국외 교포사회까지 전파되는 등 민족 고유의 구기로, 대중스포츠로 자리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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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인이 가장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족구화 만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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