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한국영화의 오늘-비전부문 초청작 ‘들꽃’으로 첫 스크린에 데뷔한 신예 정하담(21)이 그 주인공.
영화 ‘들꽃’은 박석영 감독의 첫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거리에 내몰린 가출 소녀들의 삶을 마주한 작품. 극단적인 생존의 위험에 내몰린 소녀들, 그들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인 어른들 그리고 소녀들을 지켜보는 두 남자의 모습을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정하담은 남모를 사연을 가진 채 언니들에게 의지하는 하담 역을 맡아,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압도했다.
극중 하담은 말수가 없다. 그리고 표정도 늘 무뚝뚝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울함, 불안감 그리고 세상을 향한 경계심을 오직 눈빛과 표정으로만 보여줬다. 오랜시간 작품을 해온 배우들도 쉽지 않은 연기였다. 하지만 정하담은 용감했다. 그리고 무모하기까지 했다. 그의 불타는 연기열정이 이번 작품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빛낼 최고의 원석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첫 주연작이 데뷔작인데, 부산국제영화제까지 초청받았다.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영화에 출연한 것도 신기한데, 영화제까지 초청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아직도 실감이 안나고, 혹여나 제가 영화에 누를 끼치지 않았는지 걱정이 앞섰죠. 다른 한편으론, 영화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때가 됐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어요. 촬영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들꽃’ 하담이로 살았는데, 이젠 배우 정하담으로 돌아와야 한다니 괜스레 슬퍼졌죠.”
▲첫 작품인만큼, 애착이 큰 것 같다. 어떻게 연기에 관심갖게 됐나.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연기경험도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을 조금씩 꾸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무작정 오디션에 지원을 했는데, ‘들꽃’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들꽃’은 아무런 경험이 없던 제겐 좋은 기회였어요. 자기소개, 동영상 등 저를 PR할 요소들이 참 많았죠. 그래서 이를 악 물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감독님께서 저를 선택해주신거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오디션인데, 합격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됐죠. 운이 참 많이 따라줬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막막했죠. 경험이 없다보니, 일단 무작정 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또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검증받고 싶었죠. 그렇게 제 자신을 알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론 제 자신을 알리고 싶었어요.”
▲하담 캐릭터는 참 독특하다. 배역을 어떻게 해석했나.
“극중 하담이는 가족은 물론 친구도 없고요, 거리에서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아이인 것 같았어요. 아마도 고아였을 것 같고요, 중학교 이후 방황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로 나온 것 같아요. 가출 이후 산전수전도 많이 겪었고요. 그런 하담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해 안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말수가 없는 것도 이해가 안됐고, 왜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몰랐죠. 가족도 있고, 친구들이 많은 저로선,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참 막막했죠.”
▲그럼에도 정하담의 ‘하담’은 굉장히 하담스럽게 나왔더라. 캐릭터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많았나.
“일단 거리를 무작정 걸었어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죠. 하담이가 갖고 다녔을만한 물건을 챙겨서, 영화 속 장면들처럼 도심을 걸어다녔어요. 그렇게 다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그 흔한 전단지도 제가 안주더라고요(웃음). 홍대 거리를 거닐 땐 조금 창피했고요, 동묘 인근에선 누군가 저를 잡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웠고요. 한번은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이 줄을 서 있는 거예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그 줄에 서봤는데, 몇몇 분들이 제가 여자인 걸 알고 툭툭 건드시더라고요. 그땐 정말 가슴이 철렁했어요. 그 자리에서 도망친 후 감독님께 연락드렸는데, 그 뒤론 스태프가 멀리서 저를 따라다니며 지켜줬어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해야했던 이유가 있나.
“첫 작품이고, 첫 연기인만큼, 제가 맡은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아이의 삶, 그리고 불안함과 경계심을 실제 제 감정에서 끌어내고 싶었죠. 남들이 볼 땐 무모하다고 하겠지만, 캐릭터를 위해서라면 더 심한 행동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죠.”
“사실 크게 어려운 건 없었어요. 어렵다는 게 뭔지를 몰랐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웃음). ‘들꽃’ 이전에 연기를 해본적이 없어서, 뭐가 힘든건지 잘 몰랐어요. 촬영장에 가면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고요,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는 생각에 들뜨기만 했어요. 어렵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죠.”
▲혹시 이번 영화를 하면서 기억나는 특별한 에피소느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영화 때문에 한 달 정도 친구를 안만났거든요. 평소처럼 하담이 차림으로 거리를 거닐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홍대에서 친구를 만난 거예요. 잠시 옷을 벗고 그 친구와 수다를 떨었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나 예쁘고 싶어’란 말이 툭 튀어 나온 거예요. 친구는 제 말을 듣고 깔깔대며 웃었죠. 그땐 영화가 끝나면 빨간 립스틱 바르고, 구두를 신고 싶었던 생각이 절실했어요. 그 이후로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거든요. 그런데 선물로 빨간 립스틱을 주는 거예요. 정말 눈물날 뻔했죠.”
▲완성된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니 어떤가.
“연기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좋고, 또 좋죠. 막연했던 도전이었는데, 좋은 결과물을 얻게 돼서 기뻐요.”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해보고 싶나.
“좋아하는 작품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베티 블루‘인데요. 저도 어쩌면 한번쯤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할 것 같아요.”
▲끝으로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배우,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날까지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부산=윤기백 기자 giback@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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