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韓스포츠⑤] 한반도를 짊어지고, 최후까지 분투한 ‘손기정’을 기억하십니까

“한반도를 짊어지고 뛰어라.” 여운형.

“최후까지 분투하겠습니다.” 손기정.

손기정. 사진=손기정기념재단 제공

1936년 6월3일 한국, 베를린 올림픽으로 향하는 선수들을 위한 환송행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과 선수 손기정이 나눈 대화다. 한국이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조선 민족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라고 주문받은 것이다. 손기정의 손자이자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부탁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비장한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손기정은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우승을 차지했다. 2시간29분19초, 당시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시상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기미가요(君が代)가 울려 퍼졌다. 손기정은 월계수 묘목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에 할 수 있었던 ‘저항’이었다.

 

일본인으로 기억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겼다. 올림픽 이후 손기정은 사인을 부탁받을 때마다 ‘손긔졍’이라고 새겼다. ‘KOREA’를 같이 서명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한반도를 그렸다. 당연히 일본의 시비가 이어졌다. 손기정은 “나에게 편안한 글자이니 이렇게 쓴다”고 고개를 저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손기정 특별전. 사진=최서진 기자

 “선생님 제가 일본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왜 우리나라 국기를 보지 못하고, 국가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사실 손기정이 처음 고개를 떨군 건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아니다. 이 총장은 “1935년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41초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한 뒤,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시상대에 올랐다”며 “울려 퍼지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인솔 교사를 찾아가 엉엉 울며 애국가가 연주되지 않는 슬픔을 토로했다”고 설명했다. 

 

포디움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손기정은 쉼 없이 달렸다. 1912년 8월29일 신의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자신의 뛰어난 운동능력을 깨달았으나,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달리기뿐이었다. 압록강이 꽝꽝 얼어 부잣집 친구들이 스케이트로 얼음을 누빌 때면, 부러움을 지우지 못했다. 신발에 철사를 붙여서 나름 스케이트를 만들어봤으나 그들과 견줄 수 없었다. 이 총장은 “땅에서는 손기정이 가장 빨랐지만, 얼음에선 가장 느렸다”고 설명했다.

손기정. 사진=손기정기념재단 제공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손기정은 곡물을 파는 동일상사에 취직했다. 육상의 끈은 놓지 않았다. 출퇴근할 때 압록강 주변과 근처 야산을 달리고 또 달리며 외롭게 꿈을 이어갔다. 배려의 시간도 있었다. 스무 살, 늦은 나이에 육상부가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특별입학했다. 주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이 총장은 “1학년 때, 육상부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3학년 선배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어려운 형편, 일제의 억압 등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계속 달릴 수 없었다. 손기정이 세계 정상에서 맛본 감정은 ‘끝없는 좌절감’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다시는 일장기를 달고 뛰지 않겠다며 은퇴를 결심했다. 실제로 이후 손기정의 삶에서 일장기는 멀어졌다. 사실 달리고 싶은 욕심은 굴뚝 같았다.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주변인들까지 괴롭힘당하는 모습에 또다시 고개를 떨궈야 했다. 이후 메이지 대학으로 유학에 떠났다. 일본은 달리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다. 손기정에게 자신의 전부와 같은 육상을 빼앗았다.

손기정. 사진=손기정기념재단 제공

내 것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돌려받기까지 수많은 눈물과 피를 흘렸다. 손기정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가 부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투구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었다.

 

백방으로 뛰었다. 정성스레 편지까지 썼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을 2년 앞둔 1986년이 돼서야 돌려받았다. 이 총장은 “끝까지 쉽지 않았다. 돌려주겠다면서도 끝까지 거래를 하자고 했다. 독일은 ‘복제품을 잘 만들어줄 테니 양해해 줘’라고 했다. 손기정은 독일을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할 정도로 관계가 좋았지만 ‘복제품이라면 안 받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며 “결국 국제적 문제가 불거질까 두려웠던 독일은 투구를 돌려줬다. 손기정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국력의 힘을 강조하셨고, 국가에 기증하셨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손기정 특별전. 사진=최서진 기자

어려운 시기에 ‘우리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손기정을 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진그룹 창업주 고(故) 조중훈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인 2001년쯤 손기정을 찾아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 중 하나가 손기정 선수라 찾아왔다. 나의 꿈도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통해 키웠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손기정의 투구, ‘손긔졍’ 사인 엽서 등 주요 유물은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달 25일 개막한 손기정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는 오는 12월28일까지 이어진다. 이 총장은 “의미가 크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시선과 생각을 제시한 손기정을 만날 수 있다”며 “손기정 기념관에선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도전과 승리 끝에 세계인으로 자리매김한 손기정을 만날 수 있다. 손기정의 발자취를 통해 도전정신 돌아볼 기회의 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손기정 특별전. 사진=최서진 기자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서 손기정 관련 연구는 일본보다 미진하다. 현재 한국에서 손기정을 연구한 박사 학위 논문은 딱 하나뿐이다. 반면 일본에선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이미 수많은 논문이 게재됐다. 이 총장은 “더 많은 연구와 재조명이 필요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로 그 문을 연 것 같아 기쁘다. 전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연구가 이어지길 바란다”며 “일본에는 체육과 교수, 기자들이 손사모(손기정을 사랑하는 모임), 손추모(손기정을 추모하는 모임)라는 이름으로 모여 연구와 발표를 했다. 한국도 손기정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기정. 사진=손기정기념재단 제공


최서진 기자 westjin@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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