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원의 쇼비즈워치] 외화 제목의 딜레마

머티리얼리스트 스틸 컷.

 8일 미국영화 ‘머티리얼리스트’가 국내 개봉했다.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셀린 송이 ‘패스트 라 이브즈’ 대성공 이후 내놓은 영화로서 주목받았지만, 정작 국내 개봉 직전 이슈가 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주로 영어권 영화의 국내 개봉 시 불거지는 ‘음차’ 제목 짓기 문제다. ‘머티리얼 리스트’는 그대로 원제 ‘Materialists’를 음차한 제목인데, 그렇게 개봉하면서 셀린 송 감독이 연유를 직접 설명했기 때문이다.

 

 송 감독은 “소니 코리아 측과 논의를 거치며 ‘물질주의자들’ 혹은 ‘속물들’ 등의 대안을 검토해 보았지만 함축적인 단어의 의미를 관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래서 “영어 제목을 그대로 음차해 사용하는 것이 영화의 톤과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대중문화를 다루는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한순간에 격한 반응들이 쏟아져나왔다.

 

 한 마디로, 근 수년간 저 음차 제목들이 너무 과할 지경으로 남용됐단 불만이다. 대표적인 사례들로 ‘쉬 캠 투 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보이즈 어프레이드’ 등이 언급되고, 이밖에 ‘로스트 도터’ ‘본즈 앤 올’ ‘애프터썬’ 등도 이른바 ‘문제적 제목’들로 지적됐다.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다이 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비틀스: 에잇 데이즈 어 위크-투어링 이어즈’ 등이 ‘너무 과한’ 사례들로 꼽혔다.

 

 일단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란 점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제시된 ‘잘 된 제목’, 즉 한국어 번안 제목들 역시 문제가 있단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단 자주 언급되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 등은 일본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다. 물론 좋은 제목이기만 하다면 딱히 비판받을 일까진 아니겠지만, 원작자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제목을 단순히 ‘우리말’로 만들었다고 박수 쳐 줄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저 제목들이 영화 내용과 방향성을 잘 설명해 주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음차 제목 남용의 시대로 접어든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과거엔 오히려 정반대로, 번안 제목들이 엉망이란 비판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터리로 짓느니 차라리 음차로 지으란 요구도 적지 않았다. 번안 제목은 단순히 ‘우리말’ 제목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상 한국어로 눈에 띄는 제목을 정하려면 어떤 특정한 단어 유행이 억지로라도 끼워 넣어지거나, 심지어 가히 엽기적인 제목으로라도 눈길을 끌어야 했다. 

 

 예컨대 한동안 유행했던 ‘분노 시리즈’가 있었다. 꽤 유명한 영화 중에도 ‘분노의 질주’ ‘분노의 역류’ ‘분노의 주먹’ ‘분노의 저격자’ ‘분노의 폭발’ 등 끝도 없었다. 당연히 원제와는 아무 관련 없었고, 더 중요한 건, 극 중 인물들의 각종 동기가 딱히 분노란 감정에 의한 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단 점이다. 그저 분노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한 인상 탓에 선택됐을 뿐이다.

 

 특정 문장 형태가 반복되는 경우도 잦았다. 2000년 작 ‘High Fidelity’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란 제목으로 번안돼 나름대로 인상을 남기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등이 잇따라 쏟아져 나왔고, 원제에 가까운 프랑스영화 제목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 귀에 쏙 들어온다고 여겼는지 이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등이 쏟아졌다. 이쯤 되면 서로 제목을 구분하기조차 힘들어진 셈.

 

 오역 제목도 적지 않았다. ‘가을의 전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죽은 시인의 사회’ ‘애정의 조건’ ‘기품 있는 마리아’ 등이 잘 알려졌다. 한편 음차이긴 한데 거기에 굳이 말장난을 섞어 ‘음차인 듯 아닌 듯’한 엽기적 사례도 있었다. 1990년 미국영화 ‘Mob Boss’는 이듬해 ‘맛 보슈’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했다. 이러니, 앞서 언급했듯, 지금 같은 음차 제목이 차라리 낫단 의견으로 가게 됐던 셈이다. ‘베놈: 렛 데어 비 카니지’도 문제지만, ‘백마 타고 휘파람 불고’ 역시 문제는 마찬가지였단 것.

 

 그리고 사실 이런 외국어 남발 제목을 막기 위한 지침도 30년 전쯤 이미 등장했었다. 외래어 단어를 3단어 이상 나열하지 말란 지침이 1990년대 중반 존재했다. 그러자 더 기괴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영화화는 지금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표시되지만, 개봉 당시엔 ‘센스, 센서빌리티’로 등록된 뒤 가운데 쉼표를 ‘&’처럼 적어 포스터에 싣는 것으로 상황을 돌파(?)했었다. 거스 밴 샌트의 ‘To Die For’는 급기야 ‘2 다이 4’란 제목을 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상황이 오히려 더 기이하게 변태 왜곡되자 지침도 유야무야됐다.

 

 다시 ‘머티리얼리스트’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제목이 비판받은 건, 셀린 송 감독 의도가 어디서나 동일하게 적용된 건 아니란 점 탓도 크다. ‘Materialists’는 독일에선 ‘사랑의 가치는 무엇일까’로, 포르투갈에선 ‘완벽한 짝’으로, 대만에선 ‘하늘이 맺어준 결합’으로, 그리고 베트남에선 ‘완벽한 절반’이란 제목으로 공개됐다. 그런데 송 감독은 아무래도 한국 출신인 만큼 ‘더 신경 써서’ 원제의 뉘앙스를 전달하려다 보니 오히려 단순 음차로 가게 됐단 아이러니다.

 

 난제인 게 맞다. 특히 영어권 영화 음차 제목은 한국의 높은 교육 수준과 그만큼 높은 영어 이해도 바탕으로 성립된다 볼 수 있는데, 당장 거리의 수많은 트렌디한 상점들이 영어 상호를 걸어놓고 있단 점만 봐도 저 제목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현상’인 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지나치게 ‘영어 프렌들리’한 현실이란 얘기다. 저 ‘프렌들리’란 영단어조차 ‘키즈 프렌들리’ ‘펫 프렌들리’ 등으로 국내 주요 언론지상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듯 ‘영화 제목만 툭 불거져 나온’ 상황이 아니기에 그 해결 방안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 음차 제목 문제도 이 같은 한국 사회 자체의 문제와 맞물려 논의돼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영화 제목부터 바뀌어야 세상도 바뀐다’는 식 논리라면 더 할 말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세상이 과연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명료할까. 참고로 저 고집스럽고 엉뚱하기까지 한 1980~90년대 번안 제목들 속에서도 거리의 영어 간판과 언론지상의 외래어 사용은 한순간도 후퇴하지 않고 급속도로 불어났었다. 제목 짓기 변화는 사회상의 반영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정가영 기자 jgy9322@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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