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500페소 화폐 전면에는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후면에는 그녀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얼굴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한 나라의 얼굴이자 상징인 화폐에 부부가 함께 새겨진 것은 이들이 멕시코 문화와 정신을 대표하는 라틴 문화의 아이콘임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프리다 칼로는 ‘고통의 여왕’이라 불리며 불굴의 의지와 예술혼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뮤지컬 ‘프리다’는 바로 이 전설적인 여성의 삶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김히어라라는 걸출한 배우를 만나 110분간의 완전한 예술 체험으로 승화됐다.
◆독창적 구성이 빚어낸 서사
작품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 토크쇼 게스트로 출연하게 된 프리다’라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이는 기존 실존 인물의 삶을 그린 바이오그래피 뮤지컬들이 시간 순으로 인물의 일생을 따라가는 구성에서 벗어난 혁신적 접근이다.
프리다는 레플레하(과거), 데스티노(운명), 메모리아(기억)라는 세 명의 상징적 인물들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액자 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프리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서사적 자유를 선사한다.
토크쇼라는 형식을 빌린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관객들은 마치 프리다와 직접 대화하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그녀의 고백은 더욱 생생하고 진솔하게 다가온다.

◆시련의 연속, 그리고 불굴의 의지
프리다의 인생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다. 첫 번째 시련은 6세에 찾아온 척추성 소아마비였다.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된 프리다였지만, 영특한 머리 덕분에 멕시코 최고 명문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하며 의사의 꿈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더 큰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18세의 어느 날, 하교 중 탄 버스가 전철과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버스 손잡이 역할을 하던 철근이 자궁을 관통했고, 온몸이 부서져 35번이나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의사조차 생명을 장담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9개월간의 병상 생활. 이 시기 프리다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팔로 펜 대신 붓을 잡았다. 아버지가 천장에 달아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화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은 프리다에게 절망적 현실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었다.
기적처럼 2년 후 자신의 다리로 일어선 프리다. 그녀는 의료용 코르셋을 ‘갑옷’이라, 목발을 ‘검’이라 부르며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 가장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고통
프리다에게 가장 큰 시련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이었다. 21세의 프리다는 멕시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다. 자신보다 21살이나 많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남자. 하지만 프리다는 그의 예술적 재능과 카리스마에 매혹되어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유산으로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외도를 일삼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프리다의 여동생과까지 바람을 피운 것이었다. 이는 프리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은 배신이었다.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 부모는 딸이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며 이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인생은 평생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히어라, 프리다를 완전히 입다
무대 위 김히어라는 압도적이다.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에 서는 순간 바이올린과 하나가 되어 음악 그 자체가 되듯이, 김히어라는 프리다 칼로 그 자체가 되어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천진난만한 10대 소녀에서 시작해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죽음을 앞둔 40대까지, 김히어라는 프리다의 전 생애를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 있게 연기해낸다. 특히 그녀의 캐릭터 해석력과 감정 표현의 스펙트럼은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다.
강인하면서도 여리고,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인 프리다의 복합적 감정들이 김히어라를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프리다라는 인물을 완전히 체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절망을 딛고 선 마지막 춤
개인적으로 공연 중 가장 강렬한 순간을 꼽자면 프리다가 마지막 춤을 추는 장면이다. 온갖 고통과 배신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프리다의 의지가 김히어라의 몸짓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순간 객석 곳곳에서는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터져나온다.
관객들이 우는 이유는 프리다의 처절한 인생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킨 그녀의 불굴의 정신력에 감동받기 때문이다. 김히어라는 이러한 프리다의 정신을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생명력
김히어라는 문자 그대로 무대를 온전히 채운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극장 전체가 프리다 칼로의 세계로 변한다. 무대 장악력, 배우로서의 카리스마다.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무대 위 배우 김히어라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이 떠올랐다. 본적 없던 신선함. 개인적인 아픔과 시련을 겪은 김히어라는 몇 년 사이 더 깊고 진해진 내공을 펼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김히어라가 프리다의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고통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의지의 강함과,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에 무너지는 여성으로서의 연약함. 이 상반된 감정들이 김히어라를 통해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통합되어 나타난다.
◆비바 라 비다 -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마법
프리다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의 제목은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였다.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의 이 작품명은 그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철학을 보여준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은 바로 이 비바 라 비다 정신을 현대 관객에게 전달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프리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위로와 용기를 준다.
뮤지컬 ‘프리다’는 근래 본 공연 중 가장 뜨겁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고통과 마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다. 프리다는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냈다.
김히어라의 프리다는 바로 그 불굴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덕분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번 아웃 퇴치에 성공했다. 11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프리다의 마지막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 인생이여 만세!”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또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작품과 김히어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