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여행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든 게 아름다워지잖아요.”
싱어송 라이터 권순관은 여행을 “일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동시에 낯설고 붕 떠있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바라봤다.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 보내며 반복되는 삶도 멀리서 보면 긴 여행 같이 느껴졌다. 삶을 여행에 비유한 ‘여행자’가 탄생하게 된 이유다.
◆슬럼프로 시작된, ‘여행자’의 시작
지난달 15일 공개된 ‘여행자’는 권순관이 2020년 정규 2집 ‘커넥티드(Connected)’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솔로 앨범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권순관이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여행을 떠나도 언제나 음악이 함께였다.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로 바닷가에 가서도 멜로디를 생각하고, 여행하며 음악을 위한 무언가를 얻어가려 했다. 그런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코로나가 우리 삶을 뒤덮은 2022년이었다.
데뷔 후 노리플라이로, 싱어송라이터 권순관으로 음악활동에 매진해왔던 그에게 앨범 활동도, 공연도 마음껏 할 수 없는 코로나 팬데믹은 큰 충격이었다. “그 시간을 잘 보냈어야 했는데 스스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앨범이 나왔는데 활동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내 잘못으로 가져오게됐다. 외부적인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내 안은 공허해졌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이탈리아로 한 달 간 ‘음악 없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의 다양성 속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미술관의 압도적인 작품들을 감상하는 순간들이 행복으로 다가왔다. 비우고 돌아오니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음악을 생각하지 않고 여행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힘들어 떠나온 여행이니, 아무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죠. 한 시간 동안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꿈에서 멜로디가 나오더라고요.(웃음)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쓴 곡이 노리플라이의 ‘랑데뷰’ 였죠.”
앨범에 수록된 다섯 곡은 한 편의 시처럼, 누군가를 향한 편지처럼 느껴진다. 미니앨범이지만 전곡 러닝타임이 약 23분. 앨범명과 동명의 타이틀곡 ‘여행자’는 러닝타임만 6분이 넘는다. 3분 내의 짧은 곡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의 음악 시장에선 보기 드문 곡이다.
피아노 연주는 싱어송라이터 전진희에게 맡겼다. 보컬에만 집중해도 힘든 6분 30초 보컬에 집중하기 위해 협업을 택했다. “평소에도 뮤지션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힌 그는 “‘건너편’이나 ‘어 도어(A Door)’ 같은 클래식한 곡들은 현악기가 밀어주는 힘이 필요하다. 현악기가 없으면 감동이 안 사는 경우가 있어 첼리스트의 도움도 받고 있다”고 부연했다.
권순관이 생각하는 좋은 음악은 ‘들었을 때 좋은 음악’이다. 그는 “포커스를 두는 건 첫 소절이다. 첫 소절이 좋으면 계속 듣게 된다”고 말했다. 첫 소절만 수없이 작업할 정도다. 그중 여행자는 곡의 흐름을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고자 했던 곡이다. 여행하듯 먼 산을 바라보고 나만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길 바랐다. 긴 호흡의 음악이 가지는 매력이다.
수록곡 ‘댄싱 앳 나이트’는 클래식한 사운드로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둘만의 시간을 그렸다. 권순관은 “해가 쨍쨍한 낮과 달리 어두운 밤, 미약한 빛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밤엔 더 솔직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도 밤에 이루어지지 않나. 예전엔 밤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려고만 했는데, 이제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겠더라. ‘춤을 추고 날아오르자’라는 내용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로맨틱한 시간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여행자’가 인생 속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연들에 대한 곡이라면, ‘시절인연’도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가슴아파 했는데, 이 정도의 나이가 되니까 홀가분해진 것 같다. 있어야 할 때가 있었고, 떠나가야 할 시기가 온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그게 전 연인이 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포근한 분위기의 ‘기지개’는 혼자서 괴로워하고 방황하던 시간을 털어내고 돌아갈 곳을 찾는 곡이다. 그에겐 가족의 품을 의미한다.
새 앨범까지 올 상반기 쉼 없이 곡 작업에 매진했다. 그간 팀과 솔로 앨범 외에도 이승환, 성시경, 규현, 정승환 등 동료 가수들의 곡 작업과 OST 작업 등을 거쳤다. 그는 “매일 작업실에 가서 피아노에 앉아 즉흥적으로 작업을 한다. 의도 없이, 습관이 된 루틴”이라며 “피아노를 치다 보면 몰입이 된다. ‘아직 살아있구나’하는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다.

◆아이돌과 협업 도전…‘Scenes of a MOMENT’
또 다른 수록곡 ‘에펠 타워’는 지난 5월 가수 방예담의 목소리로 먼저 세상에 나왔다. 권순관이 솔로 보컬리스트들과 협업한 ‘신스 오브 어 모먼트(Scenes of a MOMENT)’의 피날레 곡이다. 이번 앨범에는 권순관 버전의 에펠 타워가 수록됐다. 그는 “너무 애정하는 곡이다. 에펠탑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내게 남아있으니 그 시간을 내 목소리로 풀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에펠탑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고, 과거엔 송수신을 담당하는 타워로 활용됐다는 점을 주목했다. 과거엔 소리를 전달하던 건축물이 이제 도시의 상징이 되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과 에펠탑으로 오랜 시대를 공존하고 있다는 착각이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어떤 오래전의 노래처럼 멈출 수 없는 기억처럼 / 같이 걷고 싶어 너와’라는 노랫말이 탄생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에펠탑’을 ‘에펠 타워’로 표현했다. “‘에펠탑’이라고 하면 뭔가 히트곡을 노린 느낌이니 않나”라고 웃어 보인 권순관은 “지난해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파리를 여행했다. 그 중 에펠탑에서의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고 기억에 남는다”고 돌아봤다. 올림픽을 앞두고 모두가 들떠 있던 파리를 홀로 여행했다. 당시 느낀 외로움과 그리움을 노래에 담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여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키웠다.
‘신스 오브 어 모먼트’에는 방예담 외에도 인피니트의 메인보컬 남우현, 여자친구의 메인보컬 유주, 에이티즈의 메인보컬 종호가 가창자로 참여했다. 평소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좀처럼 듣지 못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아이돌 그룹의 솔로 보컬리스트를 찾아 나섰다. 그는 “작곡가로 곡을 쓴 적은 많지만 직접 섭외한 적은 처음이라 하나의 도전이었다. 내 음악을 좋아해주신 분들이라 기분 좋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풀 문(Full Moon)’을 함께한 남우현에 대해서는 “록(Rock)적인 요소가 있어서 섭외했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 배려도 많이 해주시고 친화력도 좋으셔서 기분 좋은 작업이었다”고 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평상시에는 느슨한 음악을 많이 듣는다. 치열하게 음악하다 보니 흘러가는 듯한 느낌의 곡들이 좋다. 그래서인지 아이돌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웃어보였다.

◆노리플라이 그리고 권순관
권순관은 노리플라이의 멤버로 2006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으며 자신의 음악 여정을 시작했다. 이후 2009년 노리플라이 ‘로드(ROAD)’로 정식 데뷔해 2013년 ‘어 도어(A Door)’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노리플라이와 솔로 활동을 병행하며 데뷔 17년 차를 맞았다.
권순관이 직접 쓴 곡이지만 노리플라이와 솔로 앨범 수록곡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준다. 노리플라이가 정욱재의 어쿠스틱 기타에 맞춰 청량하고 캐주얼한 느낌을 준다면 솔로 앨범은 피아노 중심의 서정적이고 유려한 음악이다. 팀으로는 청춘 지향적이고 밝은 이미지를 주는 반면 권순관의 앨범은 듣는 이들의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20대에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었다. 막연하게 시작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소용돌이처럼 흘러갔던 20대를 지나 30대엔 한층 성숙해지고자 했다. “20대는 뭣도 모르고 고집부리며 정신없이 달려왔다면, 30대 후반에는 여러가지 수용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노리플라이의 성공이 부담으로 돌아왔던 시기다. 내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을 느꼈고,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노리플라이 3집 ‘뷰티풀(Beautiful)’이 유독 고집을 부린 시기였다. 만족스러운 앨범이 나오고 나니 힘을 빼고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40대가 되자 비로소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됐다. ‘내가 하지 못하는 영역은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자’고 결심했던 그는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온전히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온전히 내 손으로 만들어야 오리지널리티가 생긴다는 결론을 냈어요. 한땀한땀 내가 하는 방법을 찾았죠. 이제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게 됐어요.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죠. 예전엔 후회가 많았는데, 이젠 최선을 다했다 싶어요. 도태되지 않고 성장하면서 계속해서 다음 완성을 꿈꾸죠.”
완벽주의를 고집했던 과거를 지나 조금은 내려놓는 방법을 택했다. “후회 남은 작업도 훗날 들어보니 장점이 될 수 있더라.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가 여전히 완벽함을 택하는 건 다름 아닌 공연이다. 오랜만에 솔로 앨범을 내고 으레 공연을 열 법도 하지만 아직 공연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다. “공연을 한다면 무대를 잘 준비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드려면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처음 공연장을 찾은 관객도 다시 오고싶어 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완성된 공연을 만들고자 한다.

이토록 공연에 진심이지만 여전히 심한 무대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대에 서고 나면, 이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무대 위라는 걸 느낀다. 권순관은 “2023년, 노리플라이 공연을 잊지 못한다”며 “후두염을 잃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관객들이 노래를 불러주셨다. 무대 위에서의 순간이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된다. 관객과 연결되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권순관은 2000년대 후반 인디 음악 전성기를 이끌었다. 익숙한 곡은 많지만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릴 기회는 적었다. 최근에는 음악 예능 복면가왕에 출연하는 등 세상 밖에 나오기 위해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권순관은 “나름대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주더라. 이번 앨범을 계기로 꾸준히 음악 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면서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다음 작품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다음에는 어떤 음악이 나올까 하는 궁금증이 나에겐 추진력이 된다. 좋은 기회가 있다면 공연으로 찾아뵙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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