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가 도래했다. 보건의료 데이터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보건의료 데이터는 단순 진료 기록을 넘어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와 의료 혁신의 핵심 자산으로 꼽힌다. 병원 안에만 머물던 데이터가 이제 병원을 넘어 일상생활 속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방 중심 의료가 현실로 다가오는 중이다. 이같은 변화 속에서 보건의료 데이터의 표준화와 품질 확보는 디지털 전환의 핵심 동력으로서 의료 현장과 산업계, 정부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데이터 가치 높이는 핵심은 ‘표준화’
1980년대 초반, 가정용 비디오 시장에서는 두 개의 기술 표준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나는 소니의 베타맥스, 또 다른 하나는 JVC의 VHS였다. 베타맥스는 더 나은 화질과 소형화된 디자인으로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제조사 간 협력이 부족했고 개방성이 낮았다. 반면 VHS는 다수의 가전 회사들이 협업하며 일관된 포맷을 채택했고 호환성을 중시했다. 이 때문에 콘텐츠 제작자, 유통사, 소비자 모두 VHS를 선호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
보건의료정보 분야에서도 이같은 표준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는 다양한 진료과, 의료기관, 의료기기 제조사,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등이 얽혀 있는 복잡한 생태계다.
예를 들어보자.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을 앓으면서 대학병원, 개인의원, 지역 보건소를 오가며 치료를 받는 일이 흔하다. 환자의 진료 기록, 영상, 처방 정보가 의료기관 간에 원활히 공유되지 않는다면 ▲중복 진료 ▲진단 지연 ▲심지어 약물 부작용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병원 진료 기록부터 웨어러블 기기, 모바일 헬스 앱에 이르기까지 보건의료 데이터의 양과 종류는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데이터가 각각 다른 형식과 체계로 존재한다면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어렵고 오히려 의료 현장의 혼란과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마치 기술적으로 우수하지만 호환성이 떨어져 사장된 베타맥스처럼 원활히 공유되지 않는 보건의료 데이터는 활용가치가 떨어진다. 보건의료 데이터의 표준화 및 상호운용성이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에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인 이유다.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는 데이터를 누구나 해석 가능한 동일한 언어로 만들고, 동일한 구조로 체계화했을 때 활용 가치가 극대화된다. 전문가들은 표준화된 데이터는 의료기관 간 정보 교류를 원활하게 함은 물론 의료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분석, 개인 맞춤형 정밀의료 구현의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환자의 진료 이력을 다른 병원에서도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면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다 정확한 질병 예측과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국내 의료데이터 표준 선도하는 한국보건의료정보원
이처럼 의료데이터의 표준화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기관이 바로 한국보건의료정보원(원장 염민섭)이다. 이곳은 국내 보건의료 데이터의 수집·관리·활용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국가 단위의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보건의료데이터 용어 및 전송 표준(이하 표준고시)’을 제정하고 있다. 보건의료정보원 측은 “의료법 제22조 제4항을 근거로 고시되는 이 표준은 의료현장의 의견과 정책적 요구를 반영해 매년 개정된다”고 설명했다.

표준고시의 핵심 구성은 바로 한국 핵심교류데이터(KR CDI)이다. 이는 병원 간 또는 기관 간 진료정보를 교류할 때 최소한으로 공유해야 하는 공통 데이터 집합이다. 즉 의료정보의 공통 언어라고 볼 수 있다.
2023년에는 진료 연속성과 유관 사업 연계를 고려해 14개 분류, 77개 항목으로 구성된 KR CDI V1이 개발됐다. 2024년에는 국제 표준용어와 의료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V2(79개 항목)가 개정 고시됐다. 올해에는 V3 개정을 목표로 국제 분류체계로 정비, 성숙도 평가체계 개선, 활용도 증가를 위한 상세설명서 개발 등의 고도화 작업이 추진 중이다.
KR CDI V3에서는 국제표준과의 정합성 확보가 주요 과제다. 국내 표준을 HL7, FHIR 등 국제적 표준과 접목해 우리나라 의료데이터가 국제 공동연구, 다국적 협진 플랫폼, 글로벌 헬스케어 산업과 연계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있다.
◆EMR 인증, ‘안전한 진료 과정의 설계도’

의료정보 표준화가 데이터 교류의 기반을 다진다면 EMR(전자의무기록) 인증은 진료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구체적인 실행 장치다. EMR 인증제는 단순히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의 보급 여부를 계량하는 게 아니라, 해당 시스템이 환자안전, 진료 효율, 보안, 정보 연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국가가 검증하는 제도다.
가령 의료기관에서는 투약오류, 처치·시술 착오, 환자 확인 부주의 등 환자 안전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이같은 사고는 대부분 EMR 시스템의 자동화 기능으로 예방이 가능하다. 인증 EMR 시스템은 이러한 안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를 다수 내재하고 있다. 예컨대, 병용금기 약물이나 중복투약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 DUR) 연계, 알레르기 약물 자동 감지, 검사기록 시 단위와 결과 오입력 방지를 위한 범위 제한 기능 등이다. 환자 확인 과정에서도 아이콘, 알림 등을 통해 동명이인을 구분한다.
EMR 인증 시스템에는 임상의사결정지원(CDS) 기능도 포함돼 있다. 보건의료정보원은 “CDS는 예를 들어, 항생제의 투여량을 자동 계산하거나, 특정 질환 환자에게 적합한 약물을 추천해주는 등의 기능을 통해 의료진의 판단을 데이터 기반으로 보완한다”며 “이는 진료의 신속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핵심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EMR 인증 시스템을 갖춘 기관 간에는 의무기록 연계도 수월하다. EMR 인증제가 협진과 진료 연속성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표준화와 EMR 인증, ‘데이터 혁신 생태계’의 첫걸음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추진하는 의료정보 표준화와 EMR 인증제의 방향성은 단순한 전산화나 시스템 고도화를 넘어 국가 의료데이터 표준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생태계는 국민 건강 증진, 헬스케어 산업의 경쟁력 강화, 국제 공동연구 참여 등 다양한 국가적 목표와 직결된다.
특히 올해부터는 HINS(보건의료정보표준) 홈페이지를 통한 표준 상세설명서의 배포, 온라인 제안 시스템, 성숙도 기반의 평가자료 제공 등을 통해 의료기관, 의료인, 정책 담당자, 개발자 모두가 함께하고 성장하는 ‘참여형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보건의료정보원 측은 EMR 인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기준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의료기관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국민은 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료환경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은 “대한민국 의료가 ‘데이터 기반의 신뢰할 수 있는 의료’로 나아가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 바로 보건의료정보 표준화”라며 “국제 표준에 맞춰 국내 표준을 정비하고 EMR 인증제를 통해 의료기관 간 원활한 데이터 연계가 이뤄지도록 해 국민의 의료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어디서나 데이터 기반의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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