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드라마가 있다. 단 한 회도 안 빼놓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억지 감정 유도도 없고, 극적인 전개를 위한 자극적인 장치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매회가 끝날 때마다 마음 한쪽이 저릿하고 눈가가 붉어진다.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떠오르는 건 결국 나의 가족, 나의 지난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내 삶이다. 이 정도로 가족 코드를 건드리면 반칙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 각자의 기억을 건드리고 감정을 흔든다. 그래서 단순히 잘 만든 드라마라는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폭싹 속았수다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감정의 서사이자 시대를 관통한 한 편의 인생 그 자체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을 담은 드라마라고 단정하고 싶다.
그동안 글을 좀 아꼈다. 16회가 마지막이 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도파민이 분포되는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 없이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림을 보듯 감정의 선을 그저 한 폭의 수채화 그려놓은 듯이 풀어놓은 듯하다. 내 인생의 드라마가 바뀌었다. 넷플릭스에서 쓰는 거대 자본은 바로 이런 곳에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1950년대 후반 제주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오애순은 총명하고 요망지며,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질문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애순 곁에는 무뚝뚝하고 어눌하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남자 양관식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에 품지만 그 사랑을 말로 전하는 데 서툴고,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꾸만 엇갈린다. 그리고 바로 그 엇갈림과 기다림, 후회와 용서의 서사가 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애순과 관식은 우리가 살아오며 겪었던 모든 사랑의 모양을 닮아 있다. 좋아하지만 말하지 못했고, 사랑했지만 지킬 수 없었으며, 결국 놓치고서야 깨닫는 마음들. 그 모든 장면이 너무 익숙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건 단순히 애절한 러브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삶뿐 아니라 한 세대의 인생을 함께 비춘다. 전쟁의 상흔, 독재의 억압, 산업화의 고단함, 민주화의 외침, IMF의 절망, 새 천년을 맞이한 설렘까지. 그 안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며, 끝내 버텨낸다.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통해 부모님의 청춘을, 할머니의 눈빛을, 내 삶의 초입을 다시 떠올린다. 이 작품은 그렇게 각자의 기억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시간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든다.
또 이 드라마는 ‘가장’이라는 존재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관식은 말수가 적고 표현에 서툰 인물이다. 하지만 늘 애순 곁에 있었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책임지려 애썼다. 관식의 인생은 수많은 한국의 아버지들과 닮아 있다.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보다 책임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들.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가장들의 삶이 관식의 모습과 겹쳐진다.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된 지금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대단한 이유는 ‘시간’을 정말 잘 다룬다는 점이다. 단지 시대의 배경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인물들의 옷차림, 말투, 삶의 태도까지 섬세하게 변화한다. 미술, 조명, 음악, 소품까지 빈틈없는 연출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이들마저 마치 그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세심한 디테일 덕분에 이 드라마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닌 ‘지나온 시간을 함께 걷는’ 경험이 된다.
인생 드라마다. 웃기 위해 본 드라마에서 눈물을 쏟고, 아무 기대 없이 시작했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버린다. 드라마를 보고 난 뒤 왠지 모르게 부모님께 전화하고 싶어지고, 과거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관계와 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이 드라마는 그런 힘이 있다. 가슴을 꺼내 보여주고, 한참을 울린 뒤 조용히 위로해주는 힘.
폭싹 속았수다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수고 많으셨수다”. 한 시대를 살아낸 모두에게, 지금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눈물겹도록 치열했던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인사다.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