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 앞 3개의 길로 나눠진 ‘삼도’가 있죠. 유심히 보면 가운데 부분이 조금 높은데요. 이는 궁궐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왕과 왕비가 지나는 ‘어도’입니다. 나머지 왼쪽(무반)과 오른쪽(문반)은 누가 걷는 길일까요? 가슴이 시키는 대로 걸어보세요.”
지난 27일 오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이용규 트래블레이블 대표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한쪽에 이어폰을 끼고 이 대표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최근 국내외 MZ세대 사이에서 ‘궁캉스’가 대세를 이어가고 있다. 예쁜 한복, 또는 조선을 배경으로 한 콘텐츠 속 인물로 변신해 경복궁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 자체가 트렌드가 됐다.
궁궐에서 젊음을 발산하는 젠지 세대가 있다면, 어른들은 궁궐을 보다 인문학적으로 즐긴다. 이들을 위한 ‘궁궐 가이드 투어’도 호응을 얻고 있다. 전문가와 함께 궁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야를 넓히는 게 목표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궁 덕후’로 거듭나는 코스일지도 모르겠다.
이날 이 대표가 진행하는 경복궁 투어에 참여했다. 흥례문~근정전~사정전~만춘전~강녕전~교태전~경회루 순으로 두 시간에 반에 걸쳐 돌아봤다.

이번 투어의 테마는 ‘세종대왕의 발자취’다. 이 대표가 운영하는 트래블레이블은 건축물 자체뿐 아니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경복궁에서는 세종대왕과 아내인 소헌왕후, 아버지 태종, 형 양녕대군, 아들 수양대군(세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갔던 황희 정승 등 당대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트래블레이블이 인물의 이야기 위주로 궁궐을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총 5개의 궁궐이 있고 이들 궁마다 각각 정전, 현전, 침전, 금천교 등이 있다”며 “용어 해석으로만 가다보면 이야기가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그 공간을 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이면 좀 더 궁궐을 이해하기 쉽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건물 형태 같은 지식정보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희는 이 공간을 썼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더 무게를 뒀다”며 “그래서 경복궁은 세종대왕 중심으로, 덕수궁은 대한제국과 고종, 창경궁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등의 이야기로 푸는 식이다. 이들의 드라마를 정리해서 듣다 보면 푹 빠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광화문에 들어서니 이내 금천교인 ‘영제교’가 나온다. 영제교의 스타 ‘메롱 천록’을 찾아본다. 용을 닮은 4마리 천록은 물길을 타고 드는 사악한 존재를 감시한다. 그 중 유독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있어 귀여움을 자아낸다. 이용규 대표는 “원래 물을 핥아 먹는 모습이 마치 메롱하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굳어진 듯하다”고 했다. 수많은 MZ세대가 메롱 천록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천록을 뒤로하고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법전 ‘근정전’으로 향한다. 내부에는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도’가 눈에 띈다. 이 대표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소개했다.
이 대표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던 침소 강녕전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 강녕전에서는 세종의 스승 맹사성 집이 보였는데, 세종이 스승이 먼저 불을 끄고 자기 전에 먼저 잘 수 없다고 늦게까지 독서했다. 맹사성도 왕이 공부를 계속하니 잠들지 않았다. 당시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한 열정이 보여지는 대목이다.

중궁전인 교태전에 이르러 왕실 여인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왕비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일단 왕비가 되자마자 외척 척결을 겪는다. 아버지가 처형당하고 어머니의 가문은 멸문당한다. 소헌왕후도 다섯째를 임신한 상황에서 갑자기 왕비가 되어 이같은 일을 겪지만 묵묵히 왕비의 삶을 살아간다. 후궁들의 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셨다고도 한다.
이와 관련된 안타까운 비화도 있다.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부친인 심온은 이처럼 태종의 ‘외척 숙청 계획’에 가담한 정치적 라이벌 박은에 의해 숙청당한다.
심온이 죽기 전 작손들에게 ‘절대 반남 박씨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야사가 있다. 600년 전 사건인데 아직도 두 집안 사이에서는 금혼 룰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이용규 대표는 “문화재 등지에서 돈을 내고 해설을 듣는 문화는 이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은 한 곳을 볼 때에도 단순히 ‘여기가 경복궁이구나’ 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알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다만 가이드 투어의 주고객층은 젠지 세대보다는 밀레니얼 세대 이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외국인이야 당연히 20대가 많지만, 국내 젊은층은 해설보다는 개인 투어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좋아해주시는 젊은 분도 계시지만 투어를 신청했다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 질려서 도망가시는 분도 있었다(웃음)”고 말했다.
이어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도 20대 때 돈 내고 해설을 들은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아직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사진 찍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싶다. 해설 가격 부담도 있을 것”이라며 “보통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취향이 바뀌면서 가이드 투어를 고려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희원 기자 happy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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